페루 안데스. 산타크루즈 트래킹 3. 푼타 유니온 고개를 향한 수행의 길을..

촉촉하게 젖은 아침을 엽니다. 여명이 드는 시각. 룸서비스 격인 각자의 텐트 앞으로 배달되어진 코카차 한잔으로 묵직한 머리를 가볍게 하고 이어 담아주는 온수로 대충 세수를 합니다. 일정동안 우리들을 수발하는 현지인 도우미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이른바 황제 트레킹입니다. 저들도 고단할텐데 우리보다 더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와 서비스 제공에 최선을 다합니다. 계면쩍은 웃음과 감사하다는 한마디 말밖에 해줄수 없고 해주는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어줘야 하는데 영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다행히 귀리죽이 나와서 스크램블한 계란과 김. 멸치볶음. 고추조림등을 섞어 잡탕을 만들어 그나마 한그릇씩 배를 채웁니다. 오늘은 일정 중 가장 험난한 코스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 고산의 통증도 더할텐데 염려스럽습니다. 이미 3,800미터 고도까지 찍은 이 야영장에서 고산증세로 여러 증상등을 토로하며 걱정들을 합니다. 속이 메시껍고 어지러워 아무것도 먹지를 못한다는 이들도 있어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머나먼 이 페루의 오지에 온 우리들의 각오를 새삼 상기시키고 최후의 일전을 위한 출정의 심정으로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홧팅을 외쳐봅니다.    젖은 기류에 상큼한 자연의 향취들을 맡으며 조금씩 고도를 높입니다. 생기 넘치는 식생들이 더없이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가슴을 한껏 열고 이 안데스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봅니다. 이 대자연 속에서 숨쉬며 비로소 내가 더불어 살아있는 느낌이 듭니다. 골마다 힘차게 흘러 내려가는 강물이 더욱 이 아침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줍니다. 이 자연의 요소들이 고산증으로 무거워진 머리속을 나름 깨끗하게 정화를 시켜주네요. 연록색으로 치장한 계곡에 우리 한국인 특유의 패션감으로 성장한 동행들의 완벽한 색채감이 더없이 화려하며 이 안데스의 한 골짜기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길게 이어가는 띠. 푼타 유니온 고개를 향한 수행의 길입니다.    두어시간을 혼줄놓고 걸어 올라가다가 입이 허전하여 목을 적시는 물한잔에 귤하나로 시장기를 속입니다. 열심히 걷는 우리를 기특히 여겼는지 신은 비로소 하늘 한귀퉁이 부터 푸르게 열어줍니다. 구름도 서서히 산등성을 타고 넘어가니 이제서야 그렇게도 연모해왔던 안데스의 진면목이 펼쳐집니다. 날카로운 산정을 지닌.. 설산이 바로 우리 코앞에 있고 그를 호위하는 산들이 장엄하게 선을 잇고 유장하게 내리는 폭포수는 하얀 선을 그으며 낙하하고 있습니다. 언덕을 넘어 제법 넓다란 목초지에는 화려한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는데 혹독한 기후에 대궁없는 꽃들이 커다란 얼굴로 땅에 붙은채 우리를 반깁니다. 마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장애자와 같은 모습이라 측은하면서도 슬픈 아름다움으로 괜시리 가슴이 저려옵니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듯이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고 위로의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그들도 우리들의 심정을 알아차린듯이 밝은 햇살 아래서 더욱 선명해진 노란 얼굴로 흔들어 대며 재롱을 부립니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한결 바람에 안데스 자연의 향기도 함께 실려오고 따사로운 햇살마저 온누리에 가득하니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우리의 힘든 여정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라 여기며 무한한 행복에 빠져듭니다.     성벽같은 산마루에 V자 홈처럼 패인 푼타 유니온 고개를 바로 눈앞에 두고 정갈한 호수 옆에다 배낭을 내리고 중식을 취합니다. 마른 샌드위치로 이 고된 등반을 헤쳐나갈 수 없어 즉석에서 매운 라면을 끓여봅니다. 약한 화력으로 끓인다기 보다 숫제 퍼지게 해서 먹는 라면. 그래도 그 칼칼한 국물맛으로 기운을 차려봅니다. 고도 5백미터 정도. 두시간의 사투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 수목한계선을 넘으며 더욱 산소결핍으로 숨고르게도 역겨운 4,750미터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몇십미터를 올리지도 못하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쉬어가기를 몇번 거듭하며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며 또 위로하며 그렇게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행렬을 이어갑니다. 애써 여유를 부릴양으로 절벽 끝에 서서 장대하게 그려진 풍경을 배경으로 일일이 사진들을 몇컷씩 찍어줍니다. 그러면서 한숨씩 고르며 호흡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쉬어가는 빈도도 잦아지면서 거의 모두가 창백해진 얼굴로 묵묵히 고행하는 순례자가 되어 나의 한계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언제부터 뿌리기 시작했는지 인식도 못했는데 어느새 우리의 뺨을 때리는 우박이 내립니다. 이마저도 더위에 지치지 않게 해주려는 하늘의 배려라 여기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길은 언제나 끝이 있게 마련인 법. 마침내 우리는 모두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안데스의 세찬 비바람이 먼저 마중을 나오고 구름마저 자욱하게 번져있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수려한 풍경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합니다. 산마루를 넘으며 바라보는 타울리 호수는 한폭의 아늑한 풍경화. 우리의 이 두발로 걸어서 올라와 만나보는 장엄한 풍경이기에 가슴이 더욱 저려옵니다. 두 천상의 모습을 함께 볼수 있는 곳. 비안개 희미하게 깔려있는 계곡에는 우리가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선명하게 구비구비 휘어져 이어져 있고 또 저쪽 계곡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또한 분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인생의 항로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엮어가는 순간이 마치 한 시공에서 펼쳐지듯이 자연에서 사계절을 다 경험하는 산타크루즈 트레킹입니다. 손이 시리고 열굴이 따가워도 모두 푼타 유니온의 표시판을 곁에 두고 기념 촬영을 한 후 애써 마음의 여유를 갖고 좌우의 풍경들을 감상합니다. 흐린 날씨에 비우박마저 뿌리는 오늘 날씨에도 이 정도 풍경인데 쾌청한 날이라면 얼마나 더 빼어난 모습으로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었을까 확연히 짐작이 갑니다. 빙하와 호수와 바위. 잘 어우러진 풍경이 예사롭지 않은 깊은 안데스의 속살을 봅니다. 시간이 멈추고 모든 것의 흐름도 멈춰진채로 한없이 이대로 머물고 싶은 그런 영원의 순간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