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가는 길. 잉카 트레일 셋째날.

어제 밤도 역시 굵은 비가 밤새 내려 과연 제대로 아침의 출발이 이뤄질까 근심했는데 기우로 끝이 났습니다. 말끔히 그쳤습니다. 잉카 트레일은 높은 지대인데다 아열대성 기후라 매일 언제 비가 내릴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비를 맞을 것인지의 문제이지 매일 온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축복받은 우리들은 거의 잠자는 밤에 텐트를 두드리고 내렸지 낮에는 대체로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맑은 산하를 마음 껏 음미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오늘도 밤에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아침 안개가 제법 자욱하나 트레킹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 안개 구름이 산정으로 쫓겨가는 형국입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걸음의 축복을 누리며 두발로 땅을 딛습니다. 바람도 머물다 가는 잉카의 계곡. 콘도르의 비상을 보며 내 삶 또한 넓은 세상으로의 도약을 꿈꿉니다.    캠프를 출발하자 마자 가이드가 열을 멈춰세워 손가락을 가르키며 왜 죽은 여인의 고개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줍니다. 길게 누운 고갯마루는 한여인의 이미 코 턱선 목 그리고 가슴의 유두까지 선명한 선을 이어가며 우리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함부로 여인들이 집밖을 나서서 높은 고개나 산을 넘으면 저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경고성 설화입니다. 어제는 가장 높은 곳을 지나기는 하였지만 오늘도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Runkuraqay(3800m)라는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어제의 묵직한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몸으로 또 아침을 열기 무섭게 오르는 2시간의 오름길은 참으로 죽을 맛입니다. 하지만 힘이 든다고 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멈출 수 없는 우리 인생길 처럼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한발짝 한발짝 올라갑니다. 그러다 보면 정상에 올라서게 되고. 그것이 인생이고 트레킹입니다. 주변에 텐트를 쳤던 다른 팀들도 거의 같은 시간에 출발하게 되니 길은 수많은 트레커들로 길게 인간띠를 형성하여 아름다운 나래를 서기도 합니다. 잠시 쉬어가라는 곳에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가 있어 이곳에서 호흡을 고르고 효과적인 등반을 위해 두팀으로 나눕니다. 너무 기다림이 길고 잦으면 본인의 페이스를 잃는 법. 구름도 산정을 향해 힘차게 치솟아 오르니 동무삼아 오르는데 건너편의 장대한 산군이 펼쳐지며 잉카의 아름다운 산수를 아낌없이 펼쳐보여줍니다. 비갠 후의 산하. 선명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니 더욱 정갈합니다.    고갯마루 넘기 전에 티없이 맑고 깨끗하여 거울처럼 건너편 풍경이 투영되는 자그마한 산정호수가 잠시 쉬어가라 권합니다. 한 숨 쉬며 오른 길 뒤돌아보니 우리가 묵었던 캠프장이 아련하게 보입니다. 가득하게 원색으로 물결치던 그 자리의 텐트들은 이미 모두 철거되어 있고 그 텐트를 짊어진 포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우리앞을 지나 갑니다. 그때 마다 뒤에서 'Porters'라고 외쳐주면 좌측을 비켜 길을 내어주는 것이 이곳의 예절이랍니다. 별반 장비나 의복도 갖추지 못하고 통풍도 되지 않는 폴리에스틸 소재 유니폼이 고작. 그들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데 처음에는 제법 역겹다 싶었는데 하루 이틀 익숙해지니 그것도 열심히 생을 영위하는 사람의 향기로 여겨지더이다.   트레킹 마지막 고개 룬쿠라카이를 넘으며 펼쳐놓는 또 다른 모습의 풍경들. 순식간에 변하는 자연의 마술입니다. 가을이 내려앉은 황금 분지에 꽃보다 더 어여쁜 단풍이 곳곳에서 반짝이며 계절을 노래합니다. 고갯마루에 서서 신이 먼저 그려놓은 자연이란 그 밑그림 속으로 아름답게 들어가는 우리 일행들의 모습을 앵글에 담아냅니다. 자연의 일부가 되고 동행들이 곧 산이 되는 조화를 두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곁을 지나던 외국 트레커들이 따라쟁이가 되어 내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국적은 다르지만 잉카 트레킹을 함께 간다는 동료의식으로 묘한 연대감이 형성되는듯 올라! 하며 인사들을 주고 받습니다. 모두 같은 날 잉카 트레일에 첫발을 딛고 또 같은 날 마추픽츄에 들어가 트레킹을 마감할 한 동기생이 되는 사람들이기에 더욱 친근감이 생깁니다. 모두 안전한 완주를기원하며 앞장을 섭니다.    High Jungle. 4천이 가까운 고산에 형성된 정글. 적도에 가까워지는 고산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입니다. 5-6킬로미터 쯤 장대하게 전혀 다른 환경의 길이 시작되는데 열대 우림의 젖은 세상이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길을 덮칠것 같은 세찬 급류. 두텁고도 거대한 잎을 지닌 선인장들. 수시로 정다운 대나무 숲도 나타나니 왠지 반갑습니다. 고목에 덕지덕지 붙은 이끼가 장구한 잉카의 역사를 대변하듯 고색창연하고 유구한 세월동안 생성과 소멸을 이어온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잔존하는 곳. 날마다 내리는 비에 씻겨내려와 폭포로 내리는 빙하녹은 물의 대향연에서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이처럼 안데스 빙하는 폭포로 내리고 강이되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데 우리의 길도 그렇게 마지막 마추픽추를 향해 이어집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안데스의 얼굴.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오락 가락하는 비를 맞게 되는데 가이드가 한마디 덧붙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잉카의 볼거리는 변함없이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있으니 그냥 즐기라는.. 곁에 있는 다락논에 풀을 뜯고 있던 염소들이 비에 젖은 채 슬픈 눈망울로 우리 이방인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한번씩 진저리를 치며 털에 붙은 물기를 털어내며 떨고 있는 듯한데 어쩌면 비가 그치기 바라는 마음은 염소도 우리도 매양 한가지일 것입니다. 극한의 안데스에서 자연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잠시 이 대자연의 변화앞에서 우리의 자만을 성찰합니다. 하루에도 사계절을 모두 경험하게 하는 잉카의 극심한 기후변화.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의탁하니 안개짙은 안데스도 걸을만합니다.    오늘은 크고 작은 유적지를 몇이나 지나게 됩니다. 아주 큰 것도 있고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는데 Sayacmarca(3580m)를 보기위해 숨도 돌릴겸 곁 트레일을 벗어나 올라가 봅니다. 오랜 세월 이렇게 비 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를 지켜온 역사의 증인답게 위풍당당하게 큰 손상없이 버티고 있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초계하고 태양과 더 가까워지려는 종교적 이유와 공동체의 주요사를 의논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그 오랜 세월만큼 바위에는 수없는 이끼가 붙어있고 돌틈에서 자라난 야생화가 단연 돋보이는 수려한 풍경입니다. 오래 묵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실감나게 해주는 자연의 조화입니다. 유적지를 지나 다시 자갈이 깔린 길. 수백년 세월이 지나도 길은 여전히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잉카 트레일 전체가 이렇게 돌로 이어서 바닥을 깔아 놓았는데 절묘하게도 갓길에 수로를 설치하고 부득이 하면 길을 가로지르도록 물길을 잡아 아무리 비가 내려도 길이 젖거나 진흙탕이 되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오랜 옛날 이처럼 물과 돌을 다루며 살아온 잉카인들의 슬기와 지혜에 찬탄을 아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원형 가깝게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요구하는 제 규격의 등산용 스틱 끝의 고무 덮개. 기꺼이 5솔을 투자해 끼웠더랬습니다.    Phuypatamarca(3640m) 고개. 지금은 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는 상당히 큰 규모였던 유적지입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보슬비로 바뀌어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고 안개 자욱한 계곡은 보이지 않는만큼 신비감을 더하고 산허리를 자른 구름위엔 신선이 올라 산수를 희롱하는 듯. 한폭의 수묵 산수화가 그려집니다. 오늘의 야영지는 2650m 고도에 있는 Winaywayna 캠프장이라 숲속길을 3시간 가량(6km) 내려가야 합니다. 급경사 하산길을 1000m를 내려가야 하는 지루하고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는힘든 구간입니다. 캠핑장에 들어서도 비는 여전히 뿌리고 눅눅해진 옷과 몸. 산골에서 내려오는 빙하녹은 물로 냉수 샤워를 하며 이한치한의 요법을가해봅니다. 내일은 새벽 4시 기상. 깨면 먹고 걷고 또 걷고 먹고 자고. 이 일상의 반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텐트지붕을 가볍게 두드리는 이곳 가을비 소리 조차도 자장가의 음률로 여기면서 자연스런 숙면의 상태로 무아경의 열반으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