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어 걷는 길. 스웨덴 쿵스레덴(Kungsleden) 2.

하루를 갈무리하는 삶의 향기가 그윽한 시간.  종주를 마치고 돌아올 Kiruna 숙소에 가방을 맡겨두고 종주에 필요한 물품만 챙겨 대형 택시를 불러서 왕의 길 종주 트레킹의 시작점인 아비스코 산장 스테이션으로 이동합니다. 샾에서 종주에 필요한 개스며 식자재등 여러가지 물품들을 장만하고 배낭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달아볼수 있게  설치된 저울에 걸어봅니다. 서로 적다 많다 무겁다 가볍다 하며 아이들처럼 가볍게 옥신각신 거리다가 조금은 촌스럽게 꾸며놓은 들머리의 조형물 앞에서 단체 기념 촬영을 하고 종주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녹음이 짙고 티없이 맑은 시내가 흐르고 주변 산들은 백설이 희끗한 기분좋은 길을 5시간 정도 걸어 Abiskojaure 산장까지 이르게 됩니다. 막 비가 갠 후라 하늘에는 자욱한 안개구름이 낮게 깔려있고 땅에서는 물기 젖은 들꽃들이 반겨줍니다. 협곡을 힘차게 흐르는 맑은 강물. 그리 크진 않지만 들판을 가득 채운 무성한 나무들. 고색창연한 바위들. 낮은 숲과 산.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나무 길. 앞으로 종주로 걷게 될 110km 쿵스레덴 피알라벤 클래식 길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기찻길 같은 보드 워크. 습한 지역이 많아 식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 널판지로 깔아서 길을 내었는데 마치 기차의 선로 같아서 마음은 기찻길을 걷던 유년의 추억속으로 빠져듭니다. 물론 바위가 길을 막는 험한 돌길에도 설치해뒀으니 과연 왕이 걷던 길이라고 여기면 나도 괜히 왕이 된 착각으로 어깨가 올라가고 우쭐해집니다. 이 나뭇길이 오래되어 부서지거나 썩으면 옆에 또 새로 나뭇길을 내니 오래된 것에는 이끼가 끼고 풀이 자라 덮어버려 이 또한 그대로 자연이 되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무심하게 이런저런 풍경들을 보면서 걷다보니 넓은 호수에 이르렀습니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이 호수 끝에는 오늘의 숙소인 산장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호수라 부르기엔 좀 그렇긴 한데 기실 강입니다. 엄청난 양과 유속으로 흘러들어와 광대한 내를 이루었다가 다시 하구로 빠져나가는데 워낙 넓은지라 호수라 해도 그냥 넘어갈 정도입니다. 구름 사이를 빠져나온 초가을 햇살이 은빛 비늘을 튕기며 호수 위로 내리고 한척의 외로운 쪽배가 가만가만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산장을 향한 호수의 왼쪽길을 따라 늘어선 떡갈나무 숲 사이로 목도가 이어지는데 문득 생각나서 뒤를 돌아보면 따라오던 숲길이 고즈넉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편 방향에서 걸어와 인사말을 건네고 어깨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디서 시작하든 별 다른 의미는 없는데 아무래도 전체적인 고도를 따진다면 북에서 남으로 진행하는 것이 고도를 낮추면서 걷기 때문에 조금 수월합니다. 거의 젊은이든 중년이든 여성이든 모두 텐트등을 넣은 큰 배낭을 매고 야영을 하면서 진행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것들도 저마다의 무게만큼 지고 아무 불평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오는 모습들을 보면 너무 귀엽기도 한데 아마도 이렇게 어릴 때 부터 자연과 깊은 정을 나누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고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홀로 산행족들도 무척 많습니다. 친구가 없진 않을텐데 어쩌면 이 대자연 속에서 알뜰하게 교감하고 또 사색하며 걷기엔 오히려 혼자가 더 나을지도 모르죠. 물론 우리처럼 외국에서 온 방문자도 제법 있지만 스웨덴 자국민들로 넘쳐납니다. 모두 하나같이 예의 그 피엘라벤 브랜드의 옷과 장비들을 착용하고 애국심을 발휘합니다. 아웃도어는 피엘라벤. 패션옷은 H&M 그리고 가구는 IKEA. 등식처럼 내나라 내물건 사랑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경제 침략의 포고를 내려 온국민이 저항하며 불매운동을 들불처럼 번지게 하는 요즘의 우리에겐 또 다른 의미를 갖고 가슴속으로 전해져 옵니다. 출발이 정오 가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짧은 거리여서 너댓시에 모두 산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전히 비는 오락가락하더니 산장에 든 이제는 제법 쏟아집니다. 을씨년스러운게 객지에 나온 우리들은 마음마저 추워진 듯하여 무쇠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핍니다. 따스한 온기가 산장안을 채워 나갈수록 투숙객들은 많아지고 소란스러워집니다. 저녁 식사 때 까지는 뭐 특별하게 할일도 없고 해서 가져온 독주와 시원한 맥주들을 사서 마시며 차분한 안식의 시간을 갖습니다. 비가 내리는 소리. 내려와 지붕이며 창문이며 두드리는 소리를 가만 들으며 지긋이 눈을 감습니다. 하루를 갈무리하는 삶의 향기가 그윽한 시간입니다.    남녀 혼탕 사우나욕의 충격적인 경험.  오늘은 유난히 푸른 하늘과 우유빛 구름이 높게 흩어진 은총이 온누리에 내리는 시작입니다. 싱그러운 랩랜드의 아침을 열고 왕의 길 트레킹 2일차의 일정을 시작합니다. Alesjaure 산장까지 이어지는 크게 오르내림이 없는 편안한 22km 길에는 호수와 설산들이 수려하게 포진해 있는데 간단없이 이어지는 매혹적인 비경의 연속에 행복한 시간입니다. 쿵스레덴 길에는 유난히 개울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습하니 나뭇길을 내놓았겠지만 아직도 낮은 산정에는 눈이 있으니 녹은 물은 실개천을 따라 내려와 넓다란 계곡을 적시며 유장하게 흐르는 강으로 보태집니다. 정갈한 시내와 도랑물은 그대로 마셔도 몸에 이로울 미네랄을 듬뿍 함유한 약수 그 자체인데 맛도 일품입니다. 이제 저만치에 광활한 호수가 나타납니다. 바람에 물결이 일어 찰랑찰랑대는 소리가 참 정겹습니다. 호수 끝 제법 높은 언덕에 산장도 어렴풋이 보입니다만 6km를 더 가야합니다. 여기서 산장까지 보트를 운영합니다. 대피소 같이 셸터를 하나 지어놓고 위급상황을 대비하여 마른 장작도 비치해두고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콜보트입니다. 이 전화기로 부르면 저기 저 산장에서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작년 이 길을 걸을 때 하루종일 비가 우울하게 내렸고 속수무책으로 속까지 젖어버려 이 셸터에서 화톳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며 보트를 기다렸던 쓰라린 그러나 지금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되돌아 볼수 있는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늘은 걷는데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화창한 날씨라 오히려 수고한 발에게 휴식을 주려 호숫물에 발을 적십니다. 물이야 여전히 차가웁지만 댓시간 정신없이 걸어오느라 지친 발은 시원하다 하며 좋아라 합니다. 쿵스레덴 트레일은 길이 험하지 않고 큰 고도차도 없는 구릉지대로 설산, 빙하, 강, 호수 등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름이면 강과 시내를 건너며 호수와 어우러진 산풍경이 일품인데 이런 호수나 강을 건너기 위해 노를 젓거나 모터 보트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 길을 종주하려면 STF 회원에 가입하는 것이 산장 이용 때나 여러 가지 서비스를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좋으며 성수기인 7,8월은 오랜 시간 전에 예약해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국립공원 내에서는 유료의 캠핑장을 운영하니 북유럽의 대자연 속에서 야생을 느낄 수 있으나 북극에 가까운 지역인 만큼 늦깎이 눈과 이른 눈의 심한 기후변화와 특히 이상 추위에 주의해야합니다. 시즌에 따라 식량 보급이 어려울 수 있으며 텐트, 장비, 식량 등을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배낭무게에도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장을 잘 이용한다면 배낭을 가볍게 할수도 있고 진정한 백팩킹의 맛을 즐길수 있는 도전의 길이기에 일정을 짜임새 있게 하여야 합니다.북극권이다 보니 생경한  백야 현상도 경험할 수 있으며 한여름에도 날씨가 시원해 더위 때문에 체력이 고갈될 염려도 별로 없어 유리하며 최적기 중 늦가을에 해당하는 9월경에는 분별없이 타오르는 단풍의 빛이 더욱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냅니다. 다시 기운을 내서 옥색 고운호수와 그 뒤에 솟아있는 설산 풍경과 가을빛을 머금은 갈대처럼 여겨지는 잡풀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간절한 것은 목을 시원하게 적시며 넘어갈 찬 맥주. 하나씩 주문해서 단숨에 들이킵니다. 마른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짜릿하고도 청량한 맛.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동행들도 이때는 모두 큰모금으로 들이킵니다. 저녁을 지어먹고 마무리 행사를 치룹니다. 사우나입니다. 스웨덴 산장의 특별한 맛인데 전기 공급도 전혀 안되니 샤워시설이 전무한데 걸음의 작업은 매일 이어지니 샤워는 해야겠죠. 그래서 거개의 산장마다 자작나무로 지핀 불로 즐기는 핀란드식 사우나 시설이 되어있습니다. 사우나로 몸이 더워지면 꼭 곁에 강물이나 호수가 있어 풍덩 뛰어들어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빙하나 만년설이 녹은 물인데 그 체감 온도야 말할 나위조차 없겠지만 한껏 데워진 몸이라 어느 정도까지는 견딜만 합니다. 차마 첫 종주 때의 충격적인 경험이 떠오르며 쓴웃음을 짓게 하는데 사우나욕은 대개 여자들만 하는 시간 그 다음에 남자들만 하고 마지막에는 남녀 혼탕입니다. 남자들만의 시간을 놓쳐버려 혼탕엘 들어가게 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성적으로 개방적인 나라 스웨덴이라서 그런지 남녀 모두 거리낌 없이 홀라당 다벗고 나신으로 사우나를 합니다. 일본의 혼탕처럼 쭈글쭈글한 노인들이 아니라 하이킹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라 눈이 즐거우면서도 시선을 어디둘 줄 몰라 참 난감합니다. 커플들이 단체로 왔는지 맥주캔 하나씩 들고 대충 작은 원형으로 만들어 대화에 빠져 있는데 내 코앞까지 다가온 젊은 여인의 풍만한 가슴. 왠 횡재냐 할수도 있겠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버리게 됩니다. 그들의 자유로움이 한편 부럽기도 하지만  아직도 유교적 관념이 조금은 남아서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수영복을 고집한 나와는 달리 함께 동행한 70대의 대선배님들은 용감하게 나신으로 동참하니 나도 인생 더 살면 저렇게 될까 하며 작은 의문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버릴 것 같은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밤을 맞이합니다. 무수히 떨어지는 별들과 함께 우리도 그 밤 풍경이 되어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