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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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 위에서 아름다운 동행들과 함께 여정을. 안개 자욱한 생장의 아침은 은은하면서도 힘있는 성당의 종소리로 시작합니다. 믿는 이가 아니라도 자연스레 마음이 경건해지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그 종소리를 향하여 머리숙이게 합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돌다리를 건너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자 여권과 하얀 조가비 하나씩 구매하고 출발준비를 합니다. 친절한 요원의 도움말을 듣고 함께 기념촬영까지 해주고 우리에게 행운까지도 빌어줍니다. 괜스레 의기양양해지는 것 같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떠나면 다시 오지 않은 종주길. 모든 것이 만나자 이별인 길과 풍물과 그리고 사람들. 회자정리만 있고 거자필반은 없는 이 길의 숙명. 스치는 모든 것들에게 안녕을 묻고 또 안녕을 전합니다. 짙은 안개를 걷어내며 오래된 도시길을 걸어 농로를 거쳐 산길로 접어들어 이 종주길에서 가장 높은 1,500미터의 피레네 산맥을 넘습니다. 천년고도 ‘생장’에는 바스크 지방의 특색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사암 벽돌로 지은 바스크식의 아름다운 가옥들. 건물마다 이름을 새겨놓은 것도 바스크의 전통인데 언덕에 올라 한시름 풀며 바라보는 마을이 마치 그림같습니다. 성당의 종탑에서는 아침 미사의 종소리가 울리고 맑은 니베강이 마을을 가로지릅니다.   ‘생장’을 벗어나 ‘운토’ 마을에 이르면 넓은 호밀밭이 펼쳐지고 야트막한 푸른 언덕에 그림 같은 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선 모습은 가히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이 지역은 고도여서 사람 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유목민이던 현 거주자들은 자연 조건이 좋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고원의 풍경에 빠져 걷다 보면 첫 번째 사설 알베르게인 오리손을 만나 짙은 안개에 젖어버린 우리들은 한 종지의 따스한 커피로 몸을 데우고 잔잔하게 흐르는 오래된 팝송을 음미하며 고단함을 푸는 휴식을 갖습니다. 안개가 걷히고 다시 순례자가 됩니다. 이제부터는 민가 한 채 없는 허허벌판과 가파른 산길만 있어 걷는 길이 힘겹지만 가끔 벗이 되는 것들이 있어 좋습니다. 군데군데 피어난 야생화 군락지에 노란 꽃을 피워내는 가시 박힌 나무가 온 산하에 펼쳐지는데 1344m의 벤타르테아 언덕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한국의 깊은 산에서만 보던 얼레지와 흡사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기 때문인데 이 같은 동토의 피레네 산맥에 피어난 야생화들이 오늘처럼 찬비안개에 젖은 채 여린 꽃잎을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오늘은 차량을 이용하여 구간이동을 합니다.  Sarria에 도착하였습니다. 노독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숙소에 여장을 내려놓고 먼저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달려갔으나 한없이 느긋한 북부 스페인 주민들은 아직도 기지개를 켜지도 않았고 제대로 된 레스토랑은 저녁이 되어서야 철문을 연다하니 가까운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고 피자랑 이것저것 시켜봅니다. 스페인 대표 맥주 Mohou와 머나먼 조국에서 공수해온 민족주 소주랑 섞어서 소맥으로 낮술 몇 순배 거푸 돌리고 쌓인 피로와 시차 무력증에 식곤증까지 덮쳐 주체할 수 없이 몰려오는 잠.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숙소로 다시 기어들어갑니다. 정신없이 밤잠처럼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벌써 오후 5시를 가리키고..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고양이 세수하고 나와 겨우 1시간이면 충분히 한 바퀴 돌 수 있는 작은 이 사리아를 휘돌아 봅니다. 그런데 아니 벌써! 생필품을 파는 가게는 4시면 이미 다 철시해버렸답니다. 도통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일상들입니다. 이 시간에서야 먹고 마시는 업소들은 부스스 문을 여는데 일상용품점들은 파장하는 시간이니 참 적응하기 힘든 나라입니다. 동네를 거의 수색하다 시피 했어도 결국은 버너용 가스를 구입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우리 한식을 조리해먹을 가장 소중한 용품인데 허탕만 치고 어둠을 맞이합니다. 강변으로 줄지은 식당가중 밤거리를 돌며 집단으로 연주하며 춤추는 악극 팀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별스런 감정으로 다가오는 카미노 산티아고 상호로 단 식당에서 저녁을 시켜 먹습니다. 사리아는 뿔포(Pulpo)라는 문어 전문 요리가 유명한데 여기서 바스케이 만이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늘 없는 해물을 특히 혐오하는 서구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너무 기호하는 식품. 덕택에 푸짐한 문어요리를 이상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식당마다 레시피를 조금씩은 달리하나 전통적인 방법은 문어를 구리 냄비에다 올리브유로 익혀서 파프리카, 피망이나 할라피뇨 등을 곁들여 먹는 요리인데 이곳의 문어 전문 식당 뿔뻬리아는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은은한 불에 서서히 구워낸 군밤도 우리 입맛에 잘 맞아 간식용으로 제격이랍니다. 그래서 사리아를 지나는 순례자들은 거리마다 넘치는 예술 작품으로 정이 넘치는 친절한 사람들과 오감을 자극하는 풍요롭고 맛깔스런 음식으로 행복합니다. 내일이면 시작되는 순례길. 차라리 시작이 종착인 듯 차분하고 안락한 이 시간의 여유로움을 큰 잔에 가득 채운 붉은 와인을 한 모금 씩 들이키며 한껏 즐깁니다. 어두워지는 고색창연한 돌담 위에는 겨울비 소리 없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