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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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하며.. 숲속의 오래된 가택은 요란스레 지저귀는 새소리에 창들을 열고 새어드는 햇살에 아침이 깹니다. 제법 무거워진 다리를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리고 침침해진 눈꺼풀을 애써 껌벅이며 열어도 오늘 마주할 새로운 풍경들을 그리며 축복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원래 오늘의 여정은 빨라스 데 레이에서 아르수아까지 걷는 30km 거리인데 어제 숙소의 위치가 팔라스를 훨씬 지난 곳이었기 때문에 제법 여유가 있는 거리입니다만 그래도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산길과 계곡이 이어져 순례자의 발걸음을 한층 무겁게 할 것입니다. 이 루트에서 우리는 루고 지역을 지나 꼬루냐 지역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변화된 풍경과 이 지방의 특색을 느껴볼 수 있는 곳으로 꼬루냐로 들어가 처음으로 만나는 도시인 멜리데는 바스케인 만이 더욱 가까워지면서 해산물 요리의 요람이라고들 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르수아까지 가장 힘든 오르막길이 3킬로미터에 걸쳐 계속됩니다. 오늘 마지막 여장을 풀 아르수아는 카미노 길 중에서 가장 현대적으로 변형을 꾀한 도시인데 그런 이유로 고딕 양식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이 일부 결합된 옛날 수도원의 일부인 막달레나 소성당 (Capilla de la Madalena)을 제외한 역사적인 유적이나 예술적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나 치즈로 유명하다 합니다. 이 치즈는 전 유럽인들이 매우 선호하는데 가장 질 좋은 최상품은 데 나비사(de Nabiza/무)라고 부르며 겨우내 무를 먹여서 짜낸 암소의 우유로 만들어 그렇다합니다. 이미 마드리드에서 맛은 보았지만 원산지에서 향취좋은 와인과 함께 고소하고 약간은 신맛이 나는 그 치즈를 먹을 작은 희망을 품고 아침식사를 나눕니다. 팬션을 빌린 덕에 다른 알베르게에서 파는 열악한 식단과는 달리 치즈와 데운 우유 그리고 요플레 등 풍성하게 줍디다만 칼칼한 국물이 그리워 주방을 빌어 매운 떡 라면을 끓여서 몸을 데우고 길을 나섭니다.   등 뒤에서 따라오며 따스하게 내려 쬐어주는 햇살을 느끼며 봄을 맞이하여 밭갈이가 한창인 갈리시아는 분뇨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가지런하게 갈아둔 밭고랑을 보니 어쩐지 친근감이 들면서 이제는 후각마저도 익숙해져 구수하게 여기지는 농토를 지납니다. 한두 채 띄엄띄엄 길가에 지어진 촌가에서 낯선 이방인에게 사납게도 짖어대는 개들의 환송을 뒤로 하고 유칼립투스 나무와 소나무가 터널처럼 드리워진 길을 한참을 걸어 드디어 카미노 정상 루트로 들어섭니다. 이미 길을 나선 많은 이들. 오래된 풍경 속으로 걷는 이들이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얼마나 바람기 많은 이들이 살았기에 카사노바라는 지명을 얻었을까 하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루고의 마지막 작은 마을을 지나니 이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 60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시 석을 만납니다. 새소리 간헐적으로 들리는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서면 포르토 강을 만나고 이강을 건너면 드디어 꼬루냐 지방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순례길을 들어서기 전에는 연일되는 비 소식에 다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도 기상 변화가 와서 계속 청명한 하늘을 보며 걷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푸르디푸른 하늘이 군데군데 채워진 구름을 안고 드리웠고 새움을 틔우는 신록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오는 계절입니다. 고색이 창연한 소담스런 다리를 건너며 정겨움이 물씬 다가오는 돌담집들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멜리데 시내로 들어섭니다. 멀리 제법 층수를 높이하고 있는 빌딩들도 보이고 갖은 광고용 현수막이나 입간판들도 어지러이 보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중국인들의 상술이 돋보이는데 지친 순례자들을 유혹하는 통증 치료 침술 제공.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겨우 며칠 걸은 우리로서는 크게 솔깃하지는 않았지만 한 달을 걸어 지치고 아픈 이들은 발길을 옮기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멜리데는 웅장한 산 페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과 산타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ía) 그리고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가장 오래된 십자가 상(Cruceiro)이 있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돌담들을 지나치고 도심으로 들어서기 위해 대로로 휘어드는데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오픈된 주방에서 상술이 덕지덕지 붙은 큰 바위 얼굴을 한 주인장이 약간은 비굴한 웃음을 던지며 유혹하는 뿔포리아 식당을 지납니다. 대형 솥에 거대한 문어들을 삶고 있습니다. 점심시간도 되어가고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되돌아 와 갑자기 환해지는 표정으로 맞이하는 주인장을 젖히고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문어요리 대자로 시키고 와인은 무엇으로 시킬까 차림표를 훑어보는데 두 자리 숫자 속에서 유독 큰 글씨로 다가오는 한 자리수의 가격 3 유로. 그것도 한 병에.. 거침없이 이것을 시키니 종업원 녀석이 뿔포 요리에는 이 와인이 제격이라며 메뉴판을 가리키는데 가격이 무려 네다섯 배나 됩니다. 질보다는 양을 추구하는 편이라 미련 없이 사양을 하고 원래 것을 시키니 차게 식혀둔 백포도주를 내어오는데 맛도 정말 일품입니다. 아마 그 옛날 우리 선술집에 배달되는 탁주 말술을 주전자나 항아리에 덜어서 팔던 식으로 오크 통 그대로 들여와 레벨이 없는 투박한 병에 담아 임시 코르크 마개로 막아서 내어오는 서민의 술인가 봅니다. 시장하고 갈증이 극에 달한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오아시스의 샘물이며 달콤하기 까지 합니다. 이내 한 병 더 시키고 또 한 병 더. 술을 시키면 어김없이 안주삼아 내어주는 바케트 빵과 운 좋으면 감자와 계란을 층으로 익혀낸 스패니쉬 오믈렛 까지 덤으로 나오는데 배는 불러오고 취기도 오르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순례 길의 한 순간이 됩니다. 스페인 순례 길에서 접하는 와인. 와인의 본 고장답게 그 종류도 수없이 많지만 또 턱없이 저렴한 가격대에 놀라고 맙니다. 왠만하게 마실 만하면 3유로 대에서 충분히 만족하니 가장 좋은 와인은 가장 내 입맛에 맞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다양하게 맛을 봅니다. 정말 부담 없이..   멜리데 시내에서 향후 길에서도 끓여서 먹을 스페인식 버너와 가스 둘을 우여곡절 끝에 구입하고 다시 걷습니다. 낮술에 기분 좋게 취해 순례자답지 않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멜리데 시가지를 벗어나 또 다시 전원적인 풍광이 나타날 즈음에 우리는 진도 아리랑을 불러대며 어린 밀 싹이 들판을 채운 길을 걸어갑니다. 소릿재 주막을 나온 우리는 이 길이 서편제 영화의 배경인 청산도 길이라며 한자락 소리로 풀어봅니다. 너울너울 춤도 추면서 말입니다. 자유로움의 표현. 그 맛에 이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스치거나 앞질러 가는 이들도 환한 웃음으로 동참하는 순례길입니다. 알콜에 몽롱해진 발길은 몰핀을 맞은 듯 가볍기만 합니다. 어께를 누르던 배낭의 무게도 삶의 무게도 이제는 더 이상 무겁지가 않습니다. 순례자의 모습은 잃어버렸더라도 일탈의 반항은 때로 카타르시스를 가져 올 때도 있답니다. 한참을 가니 이 지역 거석문화의 잔재인 우리 고인돌 같은 돌멘 데 돔바테(Dolmen de Dombate)가 군데군데 놓여 있습니다. 저 거대한 바위를 어떻게 저렇게 지붕으로 올렸을까 하는 신비로움을 느끼면서 이국의 문화와 음식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이 카미노 길에 오늘 우리가 있음이 한없는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이 길 위에서는 흘린 땀과 눈물만큼이나 또 새로운 기운이 솟습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잊고 살았던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고 이 길 끝에는 영광이 함께 할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믿고 걷고 또 걷습니다. 이 길은 함께 걷는 길이자 홀로 가는 길이며 함께 나누면서도 종국에는 홀로 지고가야 하는 인생의 하중을 가늠하는 두렵지만 설레게 하는 길입니다. 이제 수려하게 이어지는 이소 계곡을 넘어 바이쇼를 지나고 취한 듯 휘어진 3km의 오르막길 끝 이소 강변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아르수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그림자가 제법 길어진 시간에 아르수아를 1km 정도 남겨둔 사립 알베르게에 도착합니다. 품고 온 수많은 사연만큼 가지런하게 정리된 신발장에 가득 찬 신발들이 그 색깔들과 모양은 모두 달라도 왠지 하나로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 마지막 목적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장을 대충 내려두고 아르수아로 들어가 와인이며 떼띠야(작은 젖가슴)라고 불리는 전통 치즈며 먹거리 장을 보고 돌아와 저녁식사때까지 자유로운 휴식의 시간을 향유합니다. 숙소를 휘돌아 흐르는 작은 시냇물을 끌어들여 조성해둔 족욕탕에 발을 담그고 오래토록 가장 고생을 하고 있는 내 신체일부에게 쉼터를 제공하면서 아직도 밀밭 길을 걸어오는 순례자들을 바라보며 격려의 한잔을 들어 보입니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가 지친 우리 순례자의 몸과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데 어둠이 기어오는 이 시간에 느끼는 삶의 풍요로움이란 머그잔에 가득찬 맥주의 맛과 같습니다. 노을은 마주 앉은 동행의 손끝에 머무는 와인 빛에 스며들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은 생각난 듯 불어오는데 은혜로운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의 기도를 마음으로 드립니다. 이 순간 우리는 다 같이 잔을 들어 뷔엔 카미노를 크게 외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