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처녀. 융프라우. 그 길위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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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떤 풍경을 마주할까 설레는 마음에 5시에 눈이 떠지고 조심스럽게 침실을 빠져나옵니다. 샤워를 하고 넓은 발코니에 나오니 이제 여명이 걷히려고 산군 너머 검은 구름이 잉태한 해는 개벽의 난산을 거듭하면서 주변을 점점 피빛으로 물들게 합니다. 그 자연의 경이로움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데 그 풍경에 빠져들다보니 시간가는줄 모르고 식사하자는 외침에 정신줄을 되잡습니다. 뱅겐(Wengen)으로 내려가기 전에 왕의 길(Royal Trail)이라 불려지는 길을 걸어 전망대에 올라 융프라우 전체 산군을 모두 조망하는데 찍기만 하면 엽서가 되는 산군의 풍경에 취해봅니다. 이후 길은 트리오의 장관을 뒤로하면서 계속해서 융프라우 자락을 따라 라우터브루넨 계곡으로 내려가는데 거치는 벵겐까지 트램을 운행하지만 우리는 걸어서 내려가기로 합니다. 뮤렌 마을 위로 펼쳐지는 융프라우 반대편의 전체 풍경도 여유있게 감상하며 걸을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벵겐은 전형적인 U자 빙하 계곡인 라우터브룬넨의 멋진 풍광을 내려다 볼수 있는 조용한 산촌 마을입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어 전기카트만 다니는 알프스의 낭만이 고스란히 담긴 작은 청정마을이기에 더욱 깨끗한 공기와 주변 경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마을 거리마다 집집마다 환상적인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해놓은 소담스런 알프스 마을을 지나며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클라이네 슈데크로 열심히 오가는 산악열차를 보며 하산을 거듭해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에 도착하는데 융프라우 산군을 크게 나눈다면 그 거점마을이 그린델발트와 함께 이 라우터브루넨입니다. 거대한 바위면과 산봉우리 사이 계곡의 웅장한 알프스 산지에 위치해 Lauter(많은) Brunnen(분수대)의 도시명에서 알수 있듯이 72개의 포효하듯 쏟아지는 폭포와 호젓한 U자형 빙하 골짜기에 다채로운 황무지대와 외딴 산장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명소입니다. 전망좋은 카페로 들어가 생맥 한조끼에 하몽넣은 바게트 샌드위치로 시장기를 감추고 계곡을 따라 잔트바흐(Sandbach)와 스테첼베르그(Stechelberg)를 지나 오늘의 종착지인 오베르스테인베르그(Obersteinberg : 1,778m) 산장까지 진군합니다. 300m 아래로 떨어지는 슈탑바흐 폭포는 유럽에서 가장 높아 18세게 말 이곳을 다녀간 괴테는 포효하며 낙하하는 장관을 보며 폭포 너머 영혼의 노래라는 시를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빙하녹은 물이 강물이 되어 흐르는데 그 수량과 소리가 대단합니다. 그런 들판을 걸어 마지막 산장까지 치고 올라 길게 뻗은 협곡과 튠. 브리엔츠 호수까지도 조망하게되는 지친 하루. 산그늘이 완전히 덮은 시간. 거대 빙하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그림 그 자체인 산장에 들어 고된 하루를 내려놓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지고 오래된 산장 식탁앞에서 불편함보다 오히려 분위기가 더 좋은 촛불을 피워놓고 한잔 와인을 곁들인 저녁 만찬에 밤은 깊어가고 이윽고 우리 모두 산이 되어버립니다.    산장 발아래 펼쳐지는 대협곡의 장엄한 풍경은 영화의 장면들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몽환적입니다. 여장을 꾸려 아쉬운 마음 산장에 남겨두고 스테첼베르그(Stechelberg)로 다시 내려간 다음 오르막길을 치고올라 가게 되는데 소담스런 알프스의 전형적인 마을인 짐멜발트(Gimmelwald)를 거쳐 쉴트호른 (Schilthorn)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오늘입니다. 이곳은 제임스 본드의 007 영화 한 시리즈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곳인데 주변 가까이 다가온 설봉들이 경이로워 모두 마음껏 알프스의 정경을 마음에 담아올 것입니다. 거의 깔딱고개 같은 초반길을 헉헉대며 오르는데 고도가 더할수록 길가에 핀 꽃의 종류도 조금씩 변해가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사려깊게도 잠시 쉬어가란듯이 나무 벤치도 이따금 설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마을들도 시나브로 지나는데 경사진 언덕을 이용하여 단아하게 지어진 목조 주택들의 자연미가 이 알프스 대자연과 함께 하니 가옥도 자연 알프스에 속해버립니다. 나의 관심 관점이라 이렇게 집구경만 하면서 올라가도 시간가는줄 모르는데 어느새 시야가 트이면서 산아래 집들은 성냥곽만해지고 그저께 머물었던 멘리첸 산장의 모습이 눈맞춤합니다. 이제부터 오르는 내내 트리오 영봉이 시야 가득히 머무르며 함께 합니다. 발아래 펼쳐지는 산촌과 들꽃들의 향연을 감상하며 한없이 여유롭게 바람따라 흐를 수 있는 길. 좌우로 번갈아가며 빙하를 가득 채운 안부가 이어지는 거대한 설인처럼 버티어선 설산들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칼날 능선을 따라 때로는 눈밭도 지나며 가면 묵직한 워낭을 목에 건 한가로운 알프스의 소들이 길을 열어주는 곳. 각축을 하듯 피고 지는 갖은 야생화들이 우리들을 환영하여 줍니다. 한숨 쉬어가며 산록을 보면 골마다 장쾌하게 내리는 폭포가 장관인데 모두 빙하가 녹은 물이 모인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초라해지는 이 빙하들의 부피가 현대에 들어 급속도로 감소했을 정도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고 있어 이렇게 나간다면 1세기 내에 알프스의 빙하가 사라져 인근 물 부족 현상과 생태계 교란 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재난까지도 야기할 것이라는 경고는 참으로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이 웅대한 융프라우 산군의 품에 안겨 오감을 열고 걷는 이 순간을 한껏 즐기려 합니다. 알프스만의 독특한 내음이 가득 풍겨오는 바람을 가르고 걷는 길에서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나와 함께 땅에 묻힐 추억”을 만들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