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처녀. 융프라우. 그 길위에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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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발트를 떠나 전나무 숲이 무성한 제피넨탈(Sefinental)계곡을 따라 오름길은 계속되고 흩어진 작은 마을과 집들을 지나는데 어쩌다 지나치는 트레커들과 밭을 일구는 농부들 그리고 어느 작은 목장의 열어둔 작업실 문으로 치즈를 만들어내는 아낙네를 만납니다. 호기심에 다가가니 일손을 멈추고 우리에게 열심히 작업공정을 설명하고 한조각씩 시식해보라 건넵니다. 치즈 본연의 그 꼬리한 맛이 일품인데 이곳에서 한달간 숙성시켜 도시로 나간다합니다. 초원에 흩어진 젖소들 마냥 멀거러니 큰눈만 껌뻑이며 듣고 있던 남정네가 영어를 못하는지 엄지척만 올려보입니다. 너무 크다며 흥정해서 반만 잘라 구입해주고 더 잘게 몇조각 내서 하나씩 배낭에 담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하는 산골부부. 우리는 이런 곳에 오면 평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설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 그저 이방인으로 왔다가 잠시 머물렀다 가는 여행자로서는 즐거울지 몰라도 평생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실례의 말이 아닐까. 십수년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때마다 느꼈던 소회는 낭만보다는 무거운 삶에 대한 애잔함이 더 컸습니다. 잠시 머무는 이방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낭만일수 있어도 이곳에서 사시사철을 보내는 원주민들에겐 이 대자연은 도전의 극복과 변화의 적응을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목장을 지나 수목 한계선 위까지 두 시간 이상 더 오르면서 열심히 샬레와 들꽃 그리고 설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어주며 마침내 오래된 돌로 지은 로트스토크 산장(Rotstock Hut)에 도착합니다. 배낭을 내려두고 신속하게 쉴터호른 전망대로 오르는데 손에 닿을듯 가까워 보였지난 굴곡많은 바윗길을 오르려니 거의 한시간이 걸립니다. 그 유명세를 타는 쉴트호른이지만 그 명성만큼 방문객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주변을 가득채운 구름안개가 시야를 가리니 조망할 아무 것도 없고 레스토랑에서 한잔 나눌까 해도 좀전에 사놓은 치즈 생각에 바로 하산해버립니다. 아직 초성수기도 아니고 산장의 위치 때문에 그렇게 많은 투숙객이 없는 로트스토크 산장에서의 밤은 우리들만의 연회가 열립니다. 저녁 식사로 부터 이어진 치즈 안주와 와인 파티. 거듭되는 와인 주문에 우리 나이 또래의 주인장의 입이 귀까지 올라가면서 우리들의 권유로 동석하게 됩니다. 한두잔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자기도 한병 쏜다면서 가져오고 우리들의 요청에 의해 독일 원어로 부르는 에델바이스를 남저음 목청으로 들어봅니다. 큰 창문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솟은 만년설산의 침봉들과 밝은 달이 어울려 그려진 실루엣의 풍경. 더욱 가까이 다가온 별빛들이 무수히 떨어지고 아스라히 멀어진 아이거 북벽 갱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이 어두운 알프스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습니다.    산장의 아침은 이미 열였는데 아무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가만 귀기울니 토닥토닥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어두운 바깥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난 밤의 기분좋은 뒷풀이 시간은 다들 숙면을 취하게 했고 이제사 부시시 일어나는 모두는 행복한 표정들입니다. 5일간을 쉴새없이 걸었왔음에도 모두들 이력이 생겨 몸이 더 가볍다 합니다. 비오네. 많이 오네. 어쩌나. 등등의 낮은 볼멘소리가 새나오고 산장 분위기도 어쩔수 없이 무거워집니다. 그래도 비내리는 산장의 풍경도 제법 고즈넉한게 서정이 흐릅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한 사위. 포근한 산장의 온기. 성애낀 커다란 창문을 채우는 설산 풍경. 이 또한 알프스에 정주하는 신의 예술품이 아닐까 여깁니다. 어제의 격의없는 술자리 때문인지 아무래도 평소보다는 더 정성스런 아침상이 차려진듯하니 따뜻한 수프에 먼저 숟가락이 갑니다. 산장지기와의 하룻밤 정을 재회로 기약하고 우의로 무장을 하고 빗속을 헤치며 길을 나섭니다. 구름속으로 난 길은 뮤렌까지 지그재그로 지속적인 내리막길인데 혹시나 기대를 했건만 아무런 풍경을 볼수 없었습니다. 산허리를 돌아 수목한계선 아래로 들어서니 자욱한 비안개가 발길을 잡습니다.  저 푸른 초원위의 그림같은 전통가옥 샬레들도 비에 젖어 떨고 있습니다. 온통 산악지대라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관광자원으로 변모시킨 스위스 사람들의 지혜와 집념을 실감합니다. 알프스 청정 자연의 구름속 마을 뮤렌(Murren)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좀 이르지만 가볍게 점심을 먹으며 비가 개기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일기예보가 그렇게 희망을 줬기 때문이고 비에 젖은 장비도 온기로 말리고 차가워진 우리들 마음까지도 뜨거운 커피 한종지로 데울 양으로 말입니다. 소박하고 편안한 공간을 보유한 카페들은 배낭객들의 무거운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넓은 창으로 펼쳐지는 바깥 풍경을 주시하며 커피향을 음미하는데 달력에나 실릴 법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구름띠 두른 압도적인 산세가 드리우고 고풍스런 건물아래 화려한 꽃들이 함초롬히 떨고 있습니다.    비가 그치고 햇살도 구름을 비집고 나와 비추니 얼핏 눈덮인 산봉우리들이 보였지만 이내 사라져버립니다. 상쾌해진 공기를 마시며 마을길을 가니 비온 뒤의 향기가 참 좋은게 머리속도 맑아옵니다. 오늘 걷는 이길은 융프라우 산군 종주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중의 하나로 천상화원을 이어걷는데 구름바다를 뚫고 거대한 절벽으로 솟구쳐오른 알프스 명봉들이 눈에 가득차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시원한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구간이라 웅장하고도 미려한 풍경들이 널려있어 이런 길은 왼종일을 걸어도 지치지 않을것 같습니다. 오후 햇살이 넘어가자 은은한 빛으로 변신하는 알프스의 풍경속을 마저걸어 산비알에 매달린 로프호른 산장(Lobhorn Hut : 1,955m)까지 줄곧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꽃밭과 초원위로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아담한 이 산장은 오즈의 마법사가 살고 있는 듯 한데 다인실 침상 모서리에 기대어 창밖을 봅니다. 땀으로 흥건해진 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기분좋은 노곤함은 시원한 생맥 한잔으로 풀어집니다. 전설같은 거대한 3봉이 계곡너머 장쾌하게 펼쳐지고 산장아래로 뚝 떨어진 절벽 아래로는 오래된 산촌마을들이 널린 이 완벽한 풍광.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속에 내가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고 걷고 또 걸으며 지내온 시간들이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알프스의 낭만을 더해주는 이런 아늑한 산장에서 소세지 요리에 따스한 커피와 시원한 생맥주나 와인 한잔 곁들이며 길위의 동행들과 함께하는 이 이방의 밤은 더욱 그윽하게 익어갑니다.    깊은 계곡 건너편의 만년설들이 하나둘 어둠에서 깨어나고 압도하는 위용을 드러내는데 조금씩 여명이 트이며 하늘은 자줏빛으로 물들면서 하루가 시작됩니다. 7일간 걸음의 축제를 마치고 빌더스빌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늘 그랬듯이 문명과 동떨어지거나 인적 하나없는 오지를 걷는 것이 아니었던 이번 알프스의 여정도 또 다른 새로운 맛을 느끼게 했습니다. 왠만하면 찾아가기 힘든 깊은 산속에 고이 숨겨진 진주 설시플리(Sulsseewli : 1,922m) 호수를 보기위해 산장을 나섭니다. 서서히 태양이 차오르고 우리들 발아래로 구름이 몰려오니 어느새 우리는 구름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산릉을 따라 잠시 내려가 호숫가로 다가서니 티없이 맑은 물속에는 하얀 설봉과 구름 그리고 파아란 하늘이 모두 빠져 있고 단조롭다고 여겨질 즈음에는 바람이 살짝 흔들어 놓았다가 다시 비춰줍니다. 차마 두고가기 아쉬운 비경을 뒤로하고 하산을 하는데 구름이 드리운 아이거 북벽과 묀히가 살짝 보이고 그 옆으로는 알프스의 전형을 보여주는 산록과 산촌 마을 그리고 그린델발트 일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거대한 빙하으로부터 계곡 아래로 쏟아져내리는 긴 폭포가 무성한 숲을 거쳐 마을곁으로 달리니 알프스에서 맛볼 수 있는 트레킹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다시 편한 목초지로 들어서고 널찍한 초원에는 선한 눈을 가진 소떼 무리들이 가득한데 긴 반향의 워낭소리를 남기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의 배경같은 풍경이 펼쳐지며 여주인공과 일곱 아이들이 나타나 경쾌한 요들송을 불러줄 것만 같은 장면입니다. 양털구름 한가로이 흘러가는 청자색 하늘과 선명하게 드리운 만년설산에 그 아래 초록의 능선이 천국으로 이끄는 것 같아 내 안은 기쁨으로 넘쳐흐릅니다. 다른 세상으로 접속된 것 같은 느낌인데 그저 평범한 어휘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멋진 풍경으로 잠시 천국을 엿보았다 할수 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 수런수런하게 살다 지치면 조용히 회억해 되돌아볼 수 있도록 기억의 공간에 채곡채곡 쌓아둡니다. 마지막 발런알프(Ballenalp : 1,998m) 언덕에 오르니 청녹색 튠. 브리엔츠 두 호수와 인터라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도시 뒤 전망대 하더클롬으로 방문객을 실어나르는 빨간 산악 협궤열차와 창공을 비상하는 패러글라이딩의 낙하산이 총천연색으로 호수를 덮고 있습니다. 이제 작스텐(Saxeten : 1,103m)으로 긴 하산을 하면 종착지인 빌더스빌에 도착하고 융프라우 라운드 종주 트레킹은 끝이 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알프스의 향기를 맡아봅니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생생하게 보이는데 온갖 추억을 품고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초보자에게는 제법 힘들었을 고난의 길. 그래도 그 길고도 치열한 길을 함께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챙겨가며 정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동행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들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행복한 평화의 길을 걸으며 오감을 충족시켰던 힐링의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이 종주트레킹을 마감하며 수채화처럼 희미한 추억들을 오래토록 간직하라는 알프스의 배려가 아닌가 여겨지는 마지막 길. 일상으로 돌아가 또 정신없이 살다가 잠시 손을 놓고 떠올리는 추억 하나. 그 고난스러웠지만 아름답고 행복했던 길 위에서 나눈 땀과 우정과 사랑이 마냥 그리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