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로키 트레킹. 6 밴프 국립공원 Parker Ridge 트레일.
>

계절의 경계를 넘나들며. Parker Ridge Trail. 별리. 헤어짐은 아무리 재회의 기약이 있다 하더라도 아픕니다. 정이 든 만큼 더 아픕니다. 한달을 넘게 로키와 함께 정을 나누며 한 계절을 넘어 또 한 계절을 맞이하며 보낸 시간들. 여름의 끝자락에 들어와 뙤약볕 아래 검게 그을리다 이제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산한 가을이 깊어가고 있으니 참 오래도 사귄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두고 떠나는 마음이 퍽 애잔합니다. 어쩌면 이토록 고운 로키의 가을색이 더욱 그러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온통 마음과 시선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9월의 가을 로키. 이제 작별을 고하며 벽옥처럼 고운 자스퍼를 떠납니다. 달리는 차창으로 스치고 지나는 로키의 모든 풍경들이 연신 손을 흔들며 가장 빼어난 자태를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더욱 푸르고 깊어진 하늘. 한껏 부드러워진 양떼 구름. 예전보다 더 희어진 암산 기봉들. 시리도록 맑은 호수들. 상록수의 푸르름 속에 노랗게 물들어가는 활엽수들의 마지막 광기가 장엄한 대자연의 서사시를 써내려 가는듯해 보입니다. 이들을 만나면 하루 기분 좋은 일들이 이어진다는 귀한 산양들의 무리들도 우리들을 환송하기 위해 나온 양 길가에 줄을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을색이 곱게 내린 포도를 달립니다. 잎이 꽃보다 아름다워 더 대접받는 이 계절에 신작로의 갓 길에는 은행나무와 상수리 나무들이 황금색으로 불타니 그 아래 풀잎들은 꽃잎이 되어 붉은 빛으로 받쳐줍니다. 그 위로는 더욱 색갈이 짙어진 전나무 군락 위로 하얗게 내려 쌓인 눈들. 이 확연한 색의 대비로 로키의 가을은 더욱 육감적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동차 드라이브 길로는 가장 아름답다는 이 로키의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따라 달리며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지 그 얼마 만인가! 십수년전 처음 이 길을 주행하다 모서리를 돌 때마다 장대한 거벽과 압도하는 설산고봉의 로키를 대하고 느꼈던 충격같은 그 감동. 그 넘치던 환희와 감격. 그러나 해마다 점점 초라하고 옹색해지는 로키의 빙하에 실망하며 그저 건성으로 다니고 했는데 이 가을날 로키의 매력에 젖어 다시금 사랑에 빠지게 되어버렸습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산에는 첨밀한 전나무 숲이 깔렸고 산정으로 달리면 그 끝마무리를 노란 단풍의 나무들이 설산아래서 해주니 아침 햇살에 찬연하게 비끼는 풍경은 단연 압권입니다.    그런 그 길을 따라 남하하여 콜럼비아 빙원을 지나 순와파 고개를 넘으면 가을 로키의 절정이 펼쳐집니다. 산이 높으니 골도 깊어 웅대한 협곡이 굽이 치며 돌아가는데 저마다의 위용을 내세운 흰옷 입은 겨울 산봉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저점에는 가을이 황금색으로 물결치고 있는 이 장대한 풍경. 계절의 언저리가 허물어져 버린 곳. 어떻게 신이 만든 위대한 작품 앞에서 고작 인간의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저 탄성의 한숨만 새어나갑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몸을 몇바퀴 돌리며 풍경에 빠져들다가 다시 정신줄 졸라매고 산행에 나섭니다. 파커 릿지 트레일. 기껏 2.3km의 거리에 겨우 250m 높이를 오르는데 한시간이면 족한 별 대단치 않은 길. 그러나 로키의 파수꾼들은 이길을 로키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행로 베스트 10의 반열에 올려놓았는데 일단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사방 팔방 십육방으로 그려지는 절경들의 극적인 내달림을 보고난다면 모두들 수긍이 갈것입니다. 이처럼 싼 발품으로 가장 드라마틱한 풍경을 얻을 수 있으니 언제나 주차장이 넘치는 것은 당연지사로 거개가 도로 양편으로 줄 지어 세워둡니다.    우리도 어렵사리 한자리 꿰어차고 배낭을 꾸리는데 싸늘한 바람 한결 지나가더니 어두워진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9월이 막 피려하는 이 때에 만난 이 가슴터질것 같은 생경한 충격. 오랜 세월 정을 나누다 떠나는 연인에게 내리는 축복의 은총인가. 석별의 눈물인가! 분명 가슴 언저리를 따스하게 하는 서설입니다. 사선으로 비끼는 눈은 이미 전날밤에 내려 다져놓은 길위에도 소나무 위에도 들풀 위에도 가을 꽃잎 위에도 하얗게 쌓이기 시작합니다. 삽시간에 설국이 되어버립니다. 하늘을 우러러 그 눈을 맞으며 살아있는 날을 찬미하며 자연의 냄새와 촉감을 느껴봅니다. 신선하고도 통쾌한 이 느낌. 두팔을 벌려 한바퀴 빙그르르 돌아도 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이 대자연에서의 무한한 자유. 살아있음이 기쁨입니다. 오르는 길은 누구나 쉽게 오르게 스위치백으로 닦아놓아 막 피어난 눈 꽃들을 감상하며 가볍게 걷는데 말뚝 표시판이 길가에 가득차 있습니다. 초지 복원을 위해 질러 다니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산수와 풍치를 희롱하며 느긋하게 걸으면 될 것을 그 길 따라 가는것이 그리도 조급증이 났던지 샛길을 너무 난무하게 내어 놓았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이 각성해야 할 지름길 산행. 정상에 발을 딛는 것. 그것만이 과연 산행의 목적이며 전부인가? 삶을 살아가며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과 진배없는 행태가 아닌가! 우리가 자연을 소중히 배려하여 후손들도 그 행복을 누리게 해줘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혼자 투덜대며 성난듯이 고개길을 치고 올라갑니다.    아직은 지척이 분간되지 않는 정상 벼랑위에 섰습니다. 분명 눈높이에 장엄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직감이 옵니다만 신은 우리를 애태우게 합니다. 오기로라도 버텨 보자면서 정상주 한잔씩 나누며 주린배 허접한 안주로 달래고 주변 설경을 둘러봅니다. 그러자 이내 거짓말 처럼 해그림자가 드리우고 눈보라가 드문드문 해지자 장막을 걷고 나타나는 희미한 산세들. 설산군을 비롯하여 빙하와 호수 그리고 그 녹은 빙하가 흘러가는 강. 로키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집합체들입니다. 그 동안의 여정에서 만났던 로키의 비경들을 이 한곳에 모두 모아 놓은듯 한편의 되돌아보는 회억의 파노라마 입니다. 트레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콜럼비아 빙원을 향해 산마루를 따라 끝없이 이어집니다. 훤히 보이는 비탈길. 오늘은 눈보라에 가려 희미하지만 저 피안의 세상은 얼마나 더 미려한 풍광을 선사할까 기어이 올라가 확인하고 싶은 산사람의 당연한 정직한 욕심. 일정 때문에 그저 마음만 보내고 하산하게 됩니다.  사려깊은 하늘은 어느새 맑은 기류를 선사하고 아이스필드 달리는 길 안전하게 햇빛마저 밝게 비쳐줍니다. 푸른 하늘은 산정 뒤에서 아름답게 드리우니 그저 탄성으로 이어집니다.캘거리로 향하다가 고별 인사를 하러 반프에 들었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인파들이  부쩍 줄어들어 그런지 철지난 마을의 풍경은 더욱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합니다. 모두가 여유로움이 넘치는 행복한 얼굴들을 하고 가을 단풍색 만큼이나 생기 넘치며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오후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길손의 눈에 비치는 머무는 이들의 일상은 이렇듯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삶의 습기를 걷어내고 그저 정겹고 훈훈하기만 할 뿐 거기에는 생활의 고단함은 묻어나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유랑의 길 위에 서있는 나는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고단하고 지친 이방인? 꿈으로 현실을 덮고 슬픈 삶을 사는 보헤미안? 미답의 땅을 기어코 밟아보려는 욕심스런 프론티어? 아무래도 좋습니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은 또한 자기만족 이기에 내 스스로 족함이 가득하니 감히 행복하다 말할수 있겠지요. 두고 떠나는 로키의 고즈넉한 저녁 빛이 여전히 화단 가득 예쁜 꽃잎 위에 탐스럽게 피어 있어 더욱 슬프도록 아름다워진 산악마을에는 서정이 가득합니다. 저도 외로워 어느새 소리없이 마을로 내려온 산그늘이 만류하는 아쉬움의 옷깃을 뿌리치고 우리는 또 다른 풍경속으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