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영혼의 킬리만자로. 그 길위에서.. 4
>

호롬보 산장에서 키보 산장으로 가는 길은 둘이 있습니다. 오른쪽 길은 돌이 많은 거친 길로 안부와 마웬지쪽으로 돌아가는 다소 힘든 길이고 왼쪽 길은 보다 쉽고 짧은 그러나 다소 가파른 길입니다. 산장을 출발한 후 너덜지대 같은 바위가 많은 지역의 급경사를 지나면서 하얀 색의 영혼의 꽃과 다양한 고산식물들과 듬성듬한 로벨리아를 보며 가다보면 마랑구 루트의 마지막 샘터인 Last Water Point가 나옵니다. 이 지점을 지나면서 부터는 길은 사막화되어 초목은 점차 없어지더니 거의 눈에 띄지 않으며 붉은색의 흙과 바위만이 보입니다. 길은 말 안장 같은 대평원의 연속 그래서 길 이름도 안장길(The Saddle)이라고 이정표를 붙여놓았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부터는 완전한 황무지로 덮는데 그 뒤로는 마웬지봉이 황량하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킬리의 가장 높은 지점은 바깥쪽 분화구의 남쪽 가장자리로 키보와 마웬지 사이산의 안부에 대단한 면적의 넓은 고원이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 열대지역에서 가장 넓은 고지대 툰드라입니다. 키보는 오늘날 여전히 사철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고 마웬지도 만년설과 빙하 지역들이 있지만 지구 온난화 같은 기후 문제로 킬리만자로 산의 빙원 전체가 언제 모두 사라질지 모르는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호롬보 산장에서 키보 산장까지 15km인데 고산증을 달래며 폴레폴레(Pole Pole : 천천히) 오르다보니 이곳은 호롬보 산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황량한 바람이 모질게 불어대는 산자락에 군대막사처럼 덩그렇게 서 있는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장인 키보 산장(4,703m)입니다. 그래도 내일의 출진을 위해 한식으로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정상까지 오르는데 모든 역량을 모아야하므로 꼭 필요한 것들만 배낭에 챙겨놓고 일찌감치 잠을 청합니다. 세계 여타 유수의 명산 고봉 등정은 모두 이렇게 0시 전후한 심야에 시도하는데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화려한 산정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 심야에 언 상태의 빙판이나 화산흙이 걷기에 편하고 셋째 정상의 기상은 오전에서 오후로 갈수록 나빠질 가능성이 많고 마지막으로 늦지 않은 시각에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삭막한 이 산장의 밤은 몽환적으로 변합니다. 새카만 밤하늘은 환한 달과 영롱하게 더욱 빛나는 별들로 가득하고 그 빛을 받은 키보는 아프리카 최고봉이자 세계 최대의 분화구다운 위용으로 더욱 빛납니다. 탄자니아의 축복, 킬리만자로. 오늘 드디어 그 정상을 탐하러 나섭니다. 새벽 1시 아무 말도 없는 너무도 조용한 산은 오히려 두렵게 여겨집니다. 이정도 높이라면 빙하가 떨어지거나 갈라지거나 혹은 크고 작은 눈사태로 밤이 살아있는데 킬리만자로는 고독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손가락 발가락등 말초 부위가 얼어터지는 듯한 추위를 느끼며 희미한 헤드램프 조명에 의지한채 화산재와 모래밭인 급사면을 천천히 지그재그로 오릅니다. 2시간정도 올라가다보면 초등에 성공한 Hans Meyer의 이름을 딴 동굴에 냉동된 표범이 있다해도 귀찮고 힘들어 그냥 지나칩니다. 하쿠나 마타타와 폴레폴레를 자기 최면술의 주문처럼 반복하여 외치며 아주 천천히 올라갑니다. 킬리만자로는 7대륙 최고봉 중에서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회자되지만 실제로는 등정 성공률이 30%에 머문답니다. 열명중 여덟명은 성공한다는 과장은 가이딩 회사에서 만들어낸 상술입니다. 다들 고산증 때문인데 천천히 걷는 것 이외에는 다른 처방이 없습니다. 화산석과 화산재가 뒤섞인 3,40도의 급경사를 한발한발 왔다리갔다리하며 올라 고요한 여명속에서 서서히 태어나는 새벽을 느낍니다. 화산 분화구 위인 길만스 포인트에 오르니 당신은 지금 5,681m의 길만스포인트에 있습니다 라는 이정표가 반깁니다. 그와 동시에 키보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데 한쪽 사면에 만년설을 인 키보가 순수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도 밟지 않은 처녀봉으로 여기고 내가 밟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능선을 따라 한발두발 더 오르니 큰 바위인 스텔라 포인트(Stella Point : 5,750m)에 도착하고 서서히 주변은 밝아집니다. 이곳에서 화산분화구를 우측에 두고 분화구 벽을 따라 2시간 정도 더 올라가면 마침내 킬리만자로 최정상 우후루피크에 닿습니다. 한쪽은 빙하 한쪽은 분화구를 이룬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사이 등뒤로 구름바다를 뚫고 태양이 솟아오르고 마웬지도 날카로운 산정을 드러냅니다. 드디어 “축하합니다. 당신은 지금 5,895m의 우후루 피크 정상에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최고봉이며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세계 최정상 봉우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간판이 세워진 아프리카 최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거대한 빙하가 장대하게 펼쳐져있고 적도의 검은 태양빛을 받아 불그스럼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굳이 극적인 정상이 아니더라도 세계 명산 정점에는 많이들 십자가를 세워둡니다만 이곳도 예외는 아닌데 괜히 숙연해지는 느낌입니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와 함께 왠지 까닭모를 서글픈 허탈감도 따라옵니다. 꿈꾸던 킬리만자로.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뛰는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고독한 영혼을 부르는 킬리만자로. 마침내 오른 이 킬리만자로 산정에서 한 줄기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제 나는 또 어느 곳으로 바람이 되어 흘러가야하나? 지그시 눈을 감습니다.  P.S.  2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야 이 후기를 쓰게 되었는데 가만 눈을 감고 회억해보니 소박한 그곳이 다시 그리워지면서 다음 다시 킬리를 찾을 때는 꼭 마차메 루트로 올라 음웨카 루트로 하산하는 새로운 길을 걷고싶다는 욕심이 불끈불끈 솟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