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바로 떠나는 바다여행. 3 작열하는 태양의 섬나라, 케이먼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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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 자메이카 북서쪽 약 290km 지점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는 케이먼 군도는 그랜드케이맨, 케이맨 브랙, 리틀 케이맨이라 불리는 3개 섬과 무수히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열도이다. 그랜드케이맨 섬의 길이가 약 35km, 최대 너비가 13km이며, 총면적이 197㎢에 지나지 않고 인구는 현재 6만을 넘지 않는 작은 섬나라인데 영어가 공용어지만 스페인어도 함께 쓴다. 1503년 5월 10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거쳐 신세계로 가는 네 번째 항해 중 최초로 이곳을 발견했고 자메이카의 일부로 경영했으나 1670년 마드리드 협정에 의해 영국에 귀속되었다. 그래서 군도의 주지사는 영국 여왕이 임명한다. 그 당시 콜롬버스가 'Las Torugas' 즉, 거북이라고 불렀던 그랜드 케이먼 군도는 그 이름처럼 바다 거북이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바다 거북이와 함께 쉽게 접할 수 없는 해저동물들의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경험은 스쿠바 다이빙을 하면서 갖게 되는 뿌듯한 기쁨이며 나아가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최고 고도가 해발 42미터 밖에 되지 않는 저지대 형태의 아슬아슬한 섬으로 강이 없어 식수조달이 원활하지는 않으나 이곳의 생활수준은 서인도 지역에서 가장 높고, 영국 신교도, 아프리카 후손들, 그리고 기타 여러 인종들이 살고 있다. 영화 "카리브해의 해적들"에서 볼수 있는 해적 검은 수염(Blackbeard)의 전설이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특히 케이맨 제도에는 외국 은행이나 기업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각종 세금 혜택을 부여받아 조세 피난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제목이 ‘The Firm’인 존 그리샴의 소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는 톰크루즈 주연의 '야망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이 케이맨 제도에서 진행되는데 탈세라는 행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했다. 섬의 중심지인 서쪽 해안에 위치한 수도 조지 타운(George Town)에는 오웬 로버츠라 이름지은 국제공항(Owen Roberts)이 있다.   기나긴 비행을 마치고 케이먼 섬에 내렸다. 쪽문을 열고 트랩을 내리는 순간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산뜻한 바람이 전율처럼 지나갔다. 연평균기온이 26℃ 정도인 이곳은 적도의 작열하는 태양과 고온에도 불구하고 습기는 없는 쾌적한 열대기후라 전형적인 케리비안의 기분좋은 날씨다. 자유로운 베가본드가 되고자 자가운전을 위해 먼저 렌트카 센터를 찾았다. 메니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영국식 차를 운전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캐이먼은 영국령인 까닭에 정치나 관습 그리고 사회 문화적으로 영국의 색채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특히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차선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나 혼돈스러웠다. 이처럼 재삼 확인하는것을 보니 이로 인해 적잖은 사고가 발생하나 보다하는 짐작이 되었고 잠시 망설이던 끝에 우리는 자가운전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혼혈의 매니져는 친절하게도 우리의 행색을 관찰하더니 스쿠바 샾으로 전화해서 연결시켜준다. 이내 샾 주인이 손수 밴을 몰고와 우리를 데리러왔다. 전혀 정갈치 못한 차량. 차라리 많은 세월속에 깊이 베인 연륜의 흔적이라 여기며 그녀의 이력을 물어봤다. 미국 메사츄세츠에서 살았는데 12년전 이곳에 다이빙 투어를 왔다가 이곳 정취와 다이빙 환경에 반해서 아예 삶의 터전을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소금물에 절고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그녀의 피부는 건강하게 보여 60을 바라보는 초로의 여인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8명의 다이버들이 승선할 수 있는 아담한 다이빙 전용 배 하나가 오두막 집 한채와 더불어 그녀 소유의 전재산이만 저 넓은 바다가 모두 또 다른 자신의 재산이라며 자족의 기쁨을 얘기했다. 해변도로를 달리다 보니 바다 저만치에 빌딩같은 배가 정박해 있었다. 카니발이나 로열 캐리비안 등 세계 유수의 대형 크루즈 선박들이 간단없이 왕래하는데 섬 연안의 수심이 너무 얕아 접안시설인 부두를 만들기에 적합지 않아 저만치 바다에 앵커를 내리고 소형 선박들로 여행객들을 나르고 있었다. 오늘이 입항하는 날 중의 하나라 조그만 부두는 인파로 넘치고 있었다.   첫 다이빙은 수심 3~40미터 깊이의 절벽(Wall Diving) 다이빙. 갑자기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따라 내려가면서 작은 구멍이나 동굴 등에 서식하는 자연 생물들을 감상하며 유영하는 다이빙의 한 형태다. 수온은 체온보호를 위해 입는 고무재질의 슈트를 입지 않아도 될 만큼 따스한 80도 정도.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가 바다속이 한번 뒤집혀져서 가시거리는 그리 좋지 않은 20미터 정도일 것이라고 다이브 메스터가 브리핑했다. 결혼 2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여행을 다이빙 투어로 대신한 조지아 애틀란타 출신의 부부와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친교를 나누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둘째아이는 한국에서 입양을 했다며 더욱 친근감을 표시해주었다. 총6명의 다이버들이 모두 메스터 다이버 이상의 베테랑급이라 특별히 짝을 지정하지 않고 그룹으로 다니기로 약정하고 코발트 빛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착용한 수경과 얼굴의 피부 사이로 그 청정 해수가 짜릿한 염분으로 전해왔는데 다른 바다보다 유난히 눈이 따가운게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호흡기로 전해오는 그 염분농도는 가히 소금 한주먹을 입에 털어 넣은 맛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섬에서 흘러나오는 강물도 젼혀 없는 탓에 담수와 혼합되지 않은 100퍼센트 순수 해수인지라 그 염도가 엄청 높아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오염되지 않고 다른 물에 희석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란 증거다.   지역 리더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모두 함께 붙어 다녔다. DVD 촬영에 더많이 찍히기 위해 촬영 사각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신경쓰면서 진귀한 해양생물들을 관찰하며 다녔다. 자그마한 터널이 있어 그 속을 줄지어 통과하면서 난생처음 대하는 수종의 희귀한 물고기들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자연의 오밀조밀한 색상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그 짜디짠 소금물을 한웅큼 마시고 말았다. 이런 유명 관광지는 자원보호 차원에서 우리 워싱턴 인근 바다에서 항시 행해지는 작살총을 사용하는 생명체의 수렵이나 채취같은 행위를 다이버들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캐이먼의 바다속은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자란 성게들이 즐비하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나이테를 말해주는 산호와 온몸에 고색창연한 이끼가 덕지덕지 붙은 대형 바다가재가 구멍마다 버티고 있어도 우리는 그저 눈으로만 시장기를 속이고 군침을 크게 삼켜야 했다. 참으로 야속한 수중여행이었다.   다시 배를 이동시켜 2차 난파선 다이빙을 실시했다. 25미터 지점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화물선 ‘RIDGEFIELD’ 호, 1962년 섬 동쪽 해안을 통과하다 기관고장으로 좌초되어 침몰했다 한다. 가시거리 30미터, 수중온도 80도, 조류나 해류가 거의없는 완벽한 다이빙 환경이다. 선상 후미에서 풍덩 뛰어들어 여섯 다이버 모두가 원을 만들어 하강을 실시하니 저만치 커다란 선박이 나름대로 그 형체를 간직한 채 온갖 수중식물들과 현란한 어종들에 둘러싸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타실이었을 것 같은 선수에는 말미잘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해초들이 무성하게 자랐고 그 사이로는 형형색색의 희귀한 어종들이 저마다의 색채를 뽐내며 유유히 떠 다녔다. 저 멀리에는 외로운 상어한마리가 지나가기도 하고 노랑 가오리들이 잠시 머물기도 하고 바다거북의 출현도 있었다. 선실 중간쯤에 다이버들의 손길을 많이 받은 탓인지 유난히 밝고 흰 색으로 눈에 띄는 좌변기가 재미있게 위치해있었다. 수장되기 전의 이 선박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잔존한 배의 형체를 가지고 그렸다 지웠다를 거푸했다.   바닥은 산호가 부서져 만들어진 하이얀 모래들이 넓은 들판을 만들었고 간간이 돌과 바위들이 어우러져 섬을 만들고 그곳에도 역시 황홀한 색감의 조화가 눈부시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이끼와 조개비들, 수초와 수중벌레들로 미니어쳐 세상이 만들어진 암반에 눈에 익은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형 해삼이 아닌가. 덥석 떼어들어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기념사진을 찍고 동료들에게도 관찰하도록 돌렸다. 한바탕 소란을 떨고 그냥 살려주려니 도저히 탐욕의 유혹을 떨칠 수 없어 부력조절기 조끼의 호주머니 몰래 쑤셔 넣었다. 마침내 그놈은 우리들의 주안상에 함께 올라와 초고추장 속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공기통의 공기가 바닥까지 가도록 알뜰하게 소모하면서 헤어지기 싫은 케이먼 섬의 바다를 동공을 통해 뇌리에 살뜰히 박았다. 보트에서 내린 우리는 조지아 친구가 두 번이나 왕복해서 제공하는 차편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스쿠바 다이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혼자 다이빙을 실시하지 않는다. 안전상의 이유로 항상 짝(Buddy) 다이빙을 하며 다이빙의 모든 과정에서 서로 돕고 곁에 있으며 상호 보호하게 되어있다. 그런 연유로 스쿠바는 룰을 지키고 동료를 배려하는 면에서 골프보다 앞서는 가장 신사적인 스포츠이며 또한 짝을 위해 자신의 위험도 감수하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요구한다.   섬에는 해발 60피트 높이의 석회암 바위가 있고 서쪽 부분은 동쪽 부분에 비해 더욱 발달되었으며 편리한 시설이나 리조트 등은 서쪽 조지타운 주변에 있고 전통적인 케이맨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이나 바 등 유흥업소들이 밀집해 있다. 섬에는 세븐 마일 비치를 포함하여 많은 아름다운 해변이 있고 섬 주변의 바다는 스쿠버 다이빙과 스노쿨링, 패러세일링, 낚시, 수영 등의 해양 스포츠로 유명하다. 또한 조지타운의 관광 명소인 축구장 크기의 절반 정도 되는 검정 석회암 지대 헬에서 작은 지옥을 경험해보고 석회암으로 만든 ‘프롬 헬(From Hell)’이라는 제품도 판매한다. 특히 웨스트 베이 지역은 초록 바다거북을 기르며 직접 만져보게도 하는 산교육장인 거북농장으로 유명하고 섬의 북쪽 끝 해안에는 특수하게 제작된 세미 잠수함을 타고 노랑 가오리(stingray)에게 먹이를 주고 관찰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팅그레이 시티가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섬의 남쪽에 위치하는 보던 타운 지역에는 케이맨 제도의 민주주의가 탄생한 역사적인 석조 건물 페드로 세인트 제임스가 있다. 그리고 섬의 중심부에는 메스틱 나무 숲속을 도보로 여행할 수 있는데 ‘메스틱 트레일’이라고 명명한다. 아틀랜티스 탐험을 경험해보는 잠수함 여정도 누구나 추천하는 경이로운 활동이며 말을 타고 밀림을 헤치며 유유자적하다가 해안선을 따라 힘차게 달리는 승마는 간간히 수영도 함께 즐기는 혼합된 특이한 형태의 투어이다. 최근 조성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보테니컬 가든은 65에이커 규모에 야생 동,식물들의 서식을 도우며 자연과 역사의 보존 현장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 유명하다는 케이먼의 스팅그레이 시티와 세븐 마일 비치 관광을 놓칠 수 없어 보트들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해안선에는 아직도 2004년 허리케인 이반(Ivan)이 휩쓸고 지나간 복구되지 않은 상흔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보트를 타고 섬으로 들어서니 야자나무가 수양버들처럼 휘휘 늘어져 있는 정갈한 해변이 우리를 반긴다. 산호초나 조개껍질들이 파도에 깨지고 부서지고 마모되면서 만들어진 백옥같은 세븐마일 비치, 세월을 견디기 힘든 것이었을까? 이제는 침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해변의 길이가 5.5마일 정도로 줄어버렸다 한다. 귀한 산호 사장에 몸을 파뭍고 모래찜질을 즐기며 태양의 나라 케이먼 아일랜드의 볕살아래 선탠을 하면서 오수에 졸기도하며 태양열로 몸이 더워지면 파도속으로 뛰어들어 물놀이도 즐겼다. 스노클링으로 수면위에 떠 수정처럼 맑은 물속을 투시하면서 이리저리 한가로이 생각나면 한번씩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무소유의 자족이 이렇게 우리를 안락하게 한다는 느낌을 재삼 확인했다.   놀이에 다소 지친 몸을 이끌고 타운으로 돌아와 저녁을 겸한 바에 들렀다. 어느덧 서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가슴이 아려오는 진한 서러움같은 감상에 젖게하는 아름다운 낙조였다. 불현듯 가족을 떠나 다른 하늘을 이고 있다는 고독같은 것이 몰려온다. 가족들이 보고싶은 센치한 그리움도 인다. 한배씩 돌리는 캐리비언 공식주 럼 펀치, 럼과 각종 과일 추출물로 혼합한 칵테일 같은 술을 마시며 지나간 여정에 대한 후담을 나눈다. 느긋하게 취기를 더해주는 럼펀치의 매력적인 달콤함처럼 남국의 밤은 그렇게 그윽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하루를 뜨겁게 항해하다 노예선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고선의 돛대에 걸린 다소 지쳐 보이는 태양은 여정을 마감하는 우리들의 미련만큼 지는 것이 아쉬어 한참을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