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로키 트레킹. 5 밴프 국립공원 Fairview 산 정상등정 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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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서정이 가득한 산. Mt. Fairview Trail. 우리는 번다한 도시의 삶이 무거울 때 산으로 갑니다. 요즘처럼 산이 가장 화려한 가을날에 들어서면 들끓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세상사 모두 잊혀지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번잡한 저잣거리의 수런스러움도 집착의 끈을 놓지못하고 바둥거리며 살아가는 피로감도 얽히고 설킨 관계의 고단함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바쁜 일상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차분한 마음의 평정과 고요한 평화의 침묵만이 있습니다. 그저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며 한발 한발 디뎌 산길을 오르며 만나는 풍경에 오감을 열어 눈을 주고 마음을 열고 내음을 맡으며 귀를 모으고 자연이 주는 참맛을 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마음 속 응어리진 한 같은 무거운 삶의 노폐물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오고 가슴 가득 산을 닮은 맑고 푸른 덕성으로 채워집니다. 오늘처럼 만추의 서정이 만산에 가득한 캐나다 로키의 한 산자락을 오를때면 더욱 실감하는 기쁨의 고행입니다. 9월도 채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거침없는 산정 전망을 선사한다는 페어뷰 마운틴을 오르며 갖게되는 소회랍니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져가는 가을색.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토양에 그저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하던 드문 활엽수들이 잠시 삶의 끈을 느슨하게 놓자 순식간에 로키의 산하는 주황으로 물들어 버립니다. 그 길 부지런히 달려 레이크 루이스에 다다랐습니다. 오늘은 360도 조망이 가능한 2천 7백 고지의 페어뷰 마운틴의 정점에 올라 장쾌하게 이어지는 로키의 설산군을 감상하며 이미 속세로 내려가버린 가을을 확인해 보려 합니다. 루이스 호수의 남쪽 지점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페어뷰 전망대에 올라 호수와 호텔 샤토가 보여주는 풍경의 하모니를 즐기고 하산하여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길을 꺾어 새들백 고개를 넘는 1천 미터를 치고 올라야 하는 일정입니다. 길은 3.5 km. 그리 길지않으니 당연 그 경사도의 빡빡함이 자연스레 인식의 판에 그려집니다. 피톤치드 가득한 전나무 숲을 걷는 가파른 비탈길을 그래도 그 각도를 줄이려고 그 좁은 길 마저도 지그재그 형태로 걸어봅니다. 그렇게 하면 제법 수월합니다. 점점 무념 무상에 빠지게 되는 걸음의 철학. 우리 산사람들은 걸을 때 만큼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이 수려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함께 그 풍경이 됩니다. 그리고 변해가는 걸음의 진화. 내 의지 보다 앞서가는 내 발. 내 곁을 스치며 지나는 저 물과 같이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육체와 영혼의 조화로움이 생겨 별 무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오름처럼 마음 속 각오를 단단히 한 다음에는 편안한 평정이 나를 지배합니다.    새들백 패스 오르는 두 갈래길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하나는 휘 둘러가는 완만한 길이고 하나는 짧지만 치고 올라가야하는 깔딱고개입니다. 이왕지사 수도하는 마음으로 오르기로 한 것. 고통이 짧고 굵게 주어질 고난의 길을 택합니다. 헉헉대며 열심히 오르니 나무들도 듬성해지며 푸르고 맑은 하늘이 한가득 눈에 잡힙니다. 햇살에 비낀 낙엽송들이 고운 황금빛 색감을 토해내고 있는 새들백 고개. 오른편으로 묘하게 생긴 조각난 바위들을 부어 쌓아올린듯한 페어뷰 산이 있고 왼편으로는 우리네 제주도의 윗새 오름 같은 새끼 산이 어서 오라 유혹하는데 우리는 기어코 저 수행의 도량같은 페어뷰 정상에 올라 로키의 지붕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리라 다짐합니다. 얼마나 가파른 길의 연속인지 Big Step 이라고 별칭이 붙은 마의 경사길입니다. 어느새 해는 중심에서 기울고 점심 시간도 되었지만 식후의 등산이 얼마나 힘에 부대끼는 혐오스런 일임을 우리는 선험으로 알기에 그저 사과 한입 깨어물고 등정을 시도합니다. 가을 빛 곱게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는 나무 그늘을 따라 길을 시작해 갑니다. 손에 잡힐듯 가까웠던 너덜지대의 수목 한계선도 자꾸만 후퇴하는 듯 멀기만 한데 아득하지만 선명하게 그려진 길을 추적하며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 쉬게 됩니다. 하산길에 우리가 던진 예상치 않았던 반가운 인사를 받은 서양친구가 화들짝 놀라 반색을 하며 맞 인사를 해옵니다. 그러며 던지는 제언 한마디. 올려다 보지 말고 내려다 보며 풍경에 취하라고. 말이야 쉽지 행하기는 어려운 법. 애써 목적지를 외면하며 주위 풍경에 빠져들며 숨이 턱까지 차면 한숨 몰아 쉬며 카메라 앵글을 맞춰봅니다. 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땅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고정되지 않은 돌길은 언제라도 미끄러져 저 나락의 땅으로 떨어지게 하려 하니 자연 허벅지와 종아리를 한껏 당기듯 힘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이길을 가야만 하는 까닭은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로키를 떠나며 한점 회한으로 남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디 가던 빨리 가던 시간은 언제나 흘러가는 것. 마침내 누더기 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바위 정상에 올라 가슴을 여니 서늘하고도 상쾌한 공기와 함께 강렬한 햇살이 온 몸을 적십니다. 빙하위를 건너온 바람 차가웁고 한점 걸리지 않은 햇살은 따스하다 못해 따가웁기까지한 묘한 대조. 자켓을 벗을까 입을까 망서려지는 순간입니다. 발 아래는 루이스 호수가 벽옥 같이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고 성냥곽 만 해진 호텔 샤토가 앙증스레 보여집니다. 호반에 띄워놓은 색색의 카누들의 움직임은 자칫 불완전할 수 있는 풍경을 마무리 해줍니다. 눈길을 돌려 길을 따라 가면 그 동안 우리가 걸었던 길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웅장하며 서슬 푸르던 빅토리아 산이 바로 곁에 어깨동무할 사이가 되어있습니다. 자스퍼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보우호수와 함께 그 너머로 펼쳐진 장대한 빙원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반프로 캘거리로 달리는 신작로가 이어지는 보우 밸리에도 한 가득 황색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페어뷰 정상은 생각보다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니 허기진 배 해물찌개 데워서 채우고 난 오찬 후의 나른함이 봇물 터지듯 밀려옵니다. 먼저 올라와 명당자리를 점거하고 아예 잠을 청해 누워있는 군상들도 보입니다. 함께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산이 되어 시간도 정지한 채 한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귀여운 산 다람쥐 쪼르르 달려와 아는 체 하며 내 발 옆에 다가옵니다. 뭘 그리 서두르느냐며. 저랑 놀며 쉬어 가라며 만류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