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알프스, 그랜드 티톤. 그 길위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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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티톤의 아침. 멱을 감고 솟아오른 촉촉한 아침 햇살로 세면을 하고 길을 나섭니다. 매리언 호수를 빠져나온 직후 이제는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경계를 벗어나고 제데디아 스미스 와일드니스로 들어섭니다. 이 구간은 황야 지역의 탁트인 전망을 제공하는데 두어시간을 걷다보면 폭스 크릭 패스(Fox Creek Pass)에 도달하고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으로 다시 입장합니다. 여기에서 Teton Crest Trail이 Death Canyon Shelf를 따라 구불구불 휘돌아가며 전방위로 펼쳐지는 풍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탄성같은 산음소리만 낼뿐입니다. 오른쪽에는 Death Canyon이 왼쪽에는 커다란 바위 병풍이 정면에는 긴 Death Canyon Shelf와 멀리 그랜드 티턴봉의 끝이 보입니다. 계곡을 따라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 이 산행로는 이미 가을이 깊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침엽수 아래 키작은 활엽수들은 가을 엽록소를 머금고 붉고도 노랗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끼며 서리와 이슬을 말리고 이들이 뿜어내는 신기루 같은 미세한 물기에 아침이 젖어 산속은 태초의 신비로움이 가득 서려있습니다. 한발 한발 내 딛는 산길 숲길에는 이름 모를 들풀들로 가득합니다. 후덕한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며 우리를 반겨주니 보잘것없어 보이던 들풀마저도 친근하게 다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듯합니다. 피었다 이내 져버리는 한갓 들풀, 들꽃이어도 이 유구한 준령의 역사를 지켜온 산 증인으로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계곡의 청정옥수를 벗삼아 오르고 오르니 시원한 물줄기 내리는 소리가 저기서 들려옵니다. 이름없는 작은 폭포가 시원스레 낙하하고 주변의 단풍들이 더욱 윤기를 띠며 불타고 있었습니다. 고단한 몸에게 휴식의 순간을 부여하고 시장기도는 배를 간식으로 채웁니다. 한모금 들이키는 곡차가 약이되고 밥이되고 청량제가 되는 순간입니다. 홍과 황의 색, 가을색에 도취되어 함께 젖어가는 한나절입니다. 달콤한 휴식을 마감하고 머나먼 길을 다시 오르려 합니다. 이제 시작인데 개인적으로 지난 여름에 삐끗한 허리가 디스크로 발전되었는지 하체 근육이 통증으로 힘겨운데 설상가상으로 정신없이 챙기던 여행보따리에 잘못 선택된 등산화가 따라와 이미 발 뒤꿈치가 제법 벗겨져 여간 고통스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산행의 전반이고 목표는 아직도 꿈처럼 아득하게 저기 저편에 있는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자 나선 마음 들뜬 동행들의 전도를 낙심하게 할 수는 없는 터, 이를 물고 통증을 감내하며 다시 산을 오릅니다.  Death Canyon Shelf를 따라 Mount Meek Pass(2,964m)까지 오르면서 한번씩 왔던 길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망은 굉장합니다. 산이 산다울 때 그 산을 찾는 산객들은 더욱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허걱거리는 부대낌도 있어야 산행을 하는 맛이 나고 고난과 고통 뒤에 얻어지는 마음의 정화 또한 더욱 많은 법입니다. 때로는 가파른 경사에 힘들어 하고 미끄러져 엉덩방아도 찢고 때로는 순탄한 길을 걸으며 파안대소로 즐겁던 길. 산길은 우리네 인생길 입니다. 살다 보면 항상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는 법. 힘겹게 등산을 하면서 다시 즐거운 하행의 길이 있음을 잘 알기에 그런 기대와 기다림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법을 배웁니다. 이렇게 일상을 덮어버리고 달려와 오르는 산행 길. 우리의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며 자신만의 성찰의 시간을 갖는 의미깊고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오릅니다. 이 해맑은 자연 속에 나를 던지고 내 지나온 삶의 모습도 모두 보이는 것 같아 왜 나는 지난 날들을 그렇게 어리석게 살았느냐고 반문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지혜도 구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길을 나서고 또 그 길을 오늘도 걷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 길에서 생각하고 또한 그 길에서 답을 구할 것입니다. 고개를 지나면 또 다른 황량한 광야 지역으로 들어서고 알래스카 분지(Alaska Basin)를 향해 계속가면 분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극적인 전망을 제공하는데 여름이면 이 구간에 많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다시 지그재그형태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정점에 이르면 멀리 선셋 호수(Sunset Lake)가 보입니다. 호반까지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서 시장기를 속이고 다시 Hurricane Pass를 향해 투혼을 발휘하여 올라갑니다. 두고온 알래스카 분지의 기막힌 전망은 덤이고 정점에 다다르면 세 티톤 만년설봉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티톤산의 후미를 돌아서 오르는 이 산행로는 곳곳에 알알이 박힌 가을의 결실들을 음미하며 걷는 길입니다. 9백만년 전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융기된 이 산맥은 애초에는 9천미터의 높이었다는데 오랜 세월동안의 침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단단한 화강암만 남게 되어 3천미터가 넘는 거봉들이 17기나 펼쳐져 있는 오늘 날의 높이와 모습으로 변하게 된것이라 합니다. 그런 장엄한 고봉들 사이에 펼쳐진 협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농익은 가을빛이 만연하여 그 속을 걷는 우리들에게도 이내 색이 번져 손길에도 발길에도 몸짓에도 온통 가을색의 흩어져 펼쳐집니다. 고도가 있는 곳이라  뽀얗게 서리가 내려 바위위에도 꽃잎에도 잎새에도 나뭇잎에도 눈처럼 아름답게 설화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시간도 멈춘 듯 고요한 침묵이 산중에 머뭅니다. 멀리 시냇물 흐르는 정겨운 소리만 주기적으로 들려올 뿐, 풍경화의 한 폭처럼 아늑하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자갈 산길에 이어 다시 점점 좁게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로를 힘겹게 오르다 보니 뒤돌아보는 산 아래 광활한 평야들이 더 넓게 펼쳐집니다. 미국의 알프스라 칭하는 티톤 주봉에는 만년설이 뒤덮고 있어 그 풍경이 압권인데 고갯마루에 올라 산하를 굽어보면 Teton Range, Schoolroom Glacier 및 South Fork Cascade Canyon 들이 포진해 있어 흡사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대장군이라도 된듯합니다. 어느덧 티톤의 깊숙한 후미로 접어든 우리에게 티톤은 난처한 자신의 뒤태를 마침내 공개하는데 정상에는 만년설이 서슬푸르게 색을 발하고 굴러 내린 낙석들이 돌산을 이루어 우리의 발길을 더디게 합니다. 서녘 비탈에는 햇살 받은 수목의 잎들이 소슬바람에 흔들리며 찬란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불타도록 빛나는 가을빛이었습니다. 어느 하나도 스스로 완벽할 수는 없는 법. 빛이 가해지면서 하늘이며 구름이며 산이며 나무들도 그 찬연한 색을 발할 수 있는 공존의 자연 법칙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