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알프스, 그랜드 티톤. 그 길위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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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rricane Pass에서 추운 밤을 보내고 South Fork Cascade 협곡으로 길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Schoolroom 빙하와 많은 폭포들 그 아래의 청록색 호수로 이어지는 길은 긴 내리막으로 인해 무릎에 무리가 가지만 이를 보상하는 것 이상으로 전망이 빼어납니다. 티톤 지역에서 방문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으로 캐스캐이드 캐년 트레일을 따라 오르면 그 정점에는 이 종주의 하이라이트인 Paintbrush Divide이 있습니다. 호수가 있고 폭포가 있으며 단풍으로 가득한 계곡이 있고 그림 같은 벼랑이 버티어 있는 절경을 품은 산행로입니다. 4천 미터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의 웅대한 원초적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채 황홀경에 빠져드는데 동행들의 호수다라는 외침에 깨어납니다. Solitude Lake는 재충전을 하면서 반드시 시간을 할애해 머물 곳으로 수려한 전망뿐만 아니라 곧 오르게 될 Paintbrush Divide로 이어지는 길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3km 정도 길을 6백미터 고도를 더 높여야 하는 오름길. 3,361m의 페인트브러쉬 디바이드로 향한 묵행은 두시간 가까이 이어집니다. 마침내 그 정점에 서면 목표에 이르렀다는 해방감과 종주 중 가장 까다롭도록 힘든 코스 등정을 성공했다는 성취감 등이 복잡미묘하게 얽히면서 문득 엄습하는 시장기에 하체가 후들거립니다. 비록 아침에 거칠게 싼 주먹밥이어도 왕의 수라에 뒤지지 않는 맛을 서로 품평하며 한입씩 베어 물고 까마득하게 펼쳐진 산 아래의 절경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을 합니다. 작은 섬을 품은 맑고 깨끗한 옥수와 유유히 흐르는 스네이크 강물의 정감, 이름도 알 수없는 들꽃들과 드넓은 목초밭에서 평화로이 풀들을 뜯고 있는 야생 동물들의 풍경은 잔디밭에 눕다시피 기대어 여유롭게 이를 내려다보는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흐뭇하고 평화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가을 중천에 비낀 다사로운 햇살이 아늑하게 내리고 미풍은 넘실넘실 계곡을 넘나듭니다. 더 이상 등산의 힘겨움과 걱정이 없어진 지금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한 듯 넉넉한 마음입니다. 이 순간 한없이 이어지는 자족의 기쁨은 은혜처럼 축복처럼 가을날의 그윽한 햇살처럼 티톤의 산하에 한가득 넘쳐흐릅니다. 인근 옐로우스톤 공원에 옐로우스톤 호수가 있다면 티톤엔 제이크 호수가 있어 산을 더욱 산답게 만들어 줍니다. 산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티톤에는 정상 가까이에 빙하가 녹으며 만들어진 조그만 호수도 차분히 누워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성스럽게 여겨졌는지 이름도 Holly Lake이라 지어져 있습니다. 호수 어귀에는 장정 몇이서 손을 맞잡고 돌아서야 할 정도의 거대한 고사목이 나둥그러져 누웠는데 장구한 세월을 눈보라 비바람에 젖고 세월의 이끼를 머금은 채 처연하게 호수의 수호신처럼 여겨졌습니다. 뭉툭한 산정이 바로 가까이에 와있고 호수에 비치는 그 모습은 작은 피라미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닥이 훤히 보이는 호수는 거울이 따로 필요 없는 듯하였습니다. 거울처럼 맑은 물은 내 영혼마저 들여다보이도록 티 없이 고운데 내 심장 내 육신의 모든 것을 꺼내서 세척하고픈 욕심마저 듭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한껏 머물고 싶지만 길을 나서면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담고 떠나는 것이라고 여기며 삶이란 취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때로는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오늘은 깊은 잠에 빠질수 있을 듯합니다. 마지막 남겨놓은 소주도 한잔하면서 말입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호수를 차고 오르는 일출의 화려한 광경을 목격해야 합니다. 가을날 엘크의 무리들이 호수주변에서 물을 먹고 있는 풍경 또한 압권인데 또 다른 이방의 세상으로 온듯합니다. 어려운 숙제를 마감하고 난 후의 그 시원한 느낌. 오늘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하루의 일정을 느긋하게 시작합니다. 밥을 짓고 누룽지도 빡빡 긁어 먹고 숭늉까지 끓여서 먹는 이 여유. 대부분 하향길로 이어지는 오늘길을 걸으면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당일치기로 등산하는 무리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 길이 9월 단풍이 곱게 물드는 길로 정평이 나있는 페인트 브러쉬 트레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암과 괴석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포메이션과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줄기 그리고 들꽃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천상의 풍경 속에서 신선이 되어 선경을 희롱하며 하산합니다. 저 멀리에는 오늘 우리들이 품에 안길 레이(Leigh) 호수가 넓은 가슴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좌측으로 콸콸콸 쏟아져 내리는 시원스런 물줄기가 산중 가을의 청량감을 더해주고 실족을 염려하여 길게 세워둔 나무 난간을 잡고 내리니 훨씬 수월함에 내심 감사한 마음을 표하며 이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발을 멈추고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쪽빛 하늘은 우유색 구름을 보듬고 깔끔하게 펼쳐져 있고 희끗한 눈을 이고 선 티톤들이 준엄하게 산하를 호령하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는 그 풍경화 속 미완의 여백을 채워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물길 따라 나그네가 되어 구름처럼 흐르는데 이슬의 하중으로 쳐진 가을 잎들을 재치고 길을 들어서니 저만치서 길게 뻗어 내리는 물줄기가 시계에 들어왔습니다. 땀에 젖은 등골마저도 오싹하도록 시원스런 물 잔치였습니다.  다시 길을 더듬어 천연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을 따라 하산하니 전망대에 이르릅니다. 산과 물과 하늘과 구름 그리고 꽃과 나무들. 이 모든 자연의 큼직한 아이콘들을 모아 신이 재주부린 걸작을 남기는데 시야에 반쯤 차는 호변으로 하늘과 바위와 구름이 그 구도와 색의 조화를 완벽하게 과시하니 명경중의 명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노고가 봄눈 녹듯이 풀리는 듯했습니다. 너나없이 서로 한 컷이라도 더 사진을 찍기 위해 시장 북새통을 이루고 또 친절한 금자씨들이 서로 찍어주겠노라고 산을 닮은 아량을 베풀어도 줍니다. 거의 하산을 마감할 즈음에 다리 하나를 만나는데 건너지 말고 그대로 북쪽의 Leigh Lake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산들이 보듬고 있는 이 지역 가장 아름다운 호수 제니호와 레이호를 연결하는 길게 끈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의 스트링 호수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갑니다. Jenny Lake Visitor Center로 가는 길은 별 굴곡이 없이 순한 길인데 주변풍경은 더할수 없이 수려한 힐링의 길입니다. 티톤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제니호의 우아함이 저만치서 빛나는데 덤으로 주어지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물결에 반사되면서 주옥같은 반짝임이 찬사를 금할 길이 없는 절세의 풍광이었습니다. 그랜드 티톤의 삼봉이 그대로 옥수에 비치는 티없이 맑은 제니호를 고즈넉한 분위기 속 페리를 타고 건너면서 종주를 자축하는 기념 세리머니를 합니다. 수십길 깊은 바닥까지도 투명하게 비치는 호수를 바라보며 내 영혼마저도 말끔히 세척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세파에 찌든 인습과 혼탁한 마음들이 공허하도록 비워지는 순간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긴 여울을 남기는 뱃놀이에 호수위에 투영된 아름다운 삼봉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 티톤의 한 공간. 티톤 크레스트 길 위에 우리가 함께 있었음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기고 자족의 긴 한숨을 들이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