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이 함께 만들어낸 비경. 오터 트레일. 그 길위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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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늙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가면 상도 벌도 아닌 나이를 먹고 늙어갑니다. 비록 육체적으로야 체력이 딸리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정신력까지 따라 노쇠해가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못다 이룬 것들에 대한 회한담은 욕심은 더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년전에 ‘너 늙어 봤니? 난 젊어도 봤단다.’라는 말이 노래와 함께 유행어가 되어 쓰나미처럼 휩쓸고 간 때가 있었습니다. 중장년의 나이를 넘어 노년으로 접어드는 이들의 자신감을 노래하는 그 이면에는 놓고 싶지않은 청춘의 끈이 아쉬움으로 내재합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자조와 오기의 상태. 내가 그런 위치가 아닌가 싶어 쓴 미소를 짓게 됩니다. 한해한해 나이가 들어가고 막상 세운 내 일생의 마지막 이정. 세계 100대 트레킹 완주의 목표는 이제 희한한 바이러스의 지구촌 창궐이 언제까지일지 모르게 멈춰놓았습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욕망은 더욱 불타오르고 초조하기만 한데 잠시라도 국경의 빗장을 푸는 나라들을 매일 점검하며 사는 요즘입니다. 지구를 몇바퀴나 돌면서 이제 반넘게 했구나 싶었지만 막상 가서 걸어보고는 이건 아니다 싶어 빼버리고 나니 다시 또 반으로 줄어버립니다. 이런게 어떻게 세계 100대 트레일로 선정되었을까 싶은게 한탄스럽고 비분강개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남미의 꼴까 캐년과 태양의 섬. 코스타리카. 엘 초로 트랙이 그랬고 북미의 킹스 피크와 트랜스 카탈리나. 펀디 풋 패스가 그랬고 대양주의 베이 오브 화이어와 통카리로가 그랬고 유럽의 왕의 오솔길과 얌틀란드. 플리트비체가 그랬고 아프리카의 호에리콰고 트레일이 그랬습니다. 금싸라기 같은 내 젊음의 시간이 너무도 아까운 낭비였습니다. 이제는 미답의 길을 걷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가장 먼저드는 걱정이 이런 것입니다. 또 실망하면 어쩌나 싶은..   그런 심정으로 이 남아공의 해안길 오터 트레일을 걷기 위해 케이프 타운으로 내렸습니다. 위에서 말한 그 실망감을 안겨준 수준 미달의 88km Hoerikwaggo Trail(호에리콰고 트레일)을 5일간 걷고 나서 오터 트레일 마저도 그러면 어쩌나 싶은 근심을 털어낼 양으로 시원스레 인도양의 바다풍경이 펼쳐지는 해안선을 따라 랜터카로 신나게 달립니다. 남아공의 면적은 한반도의 약 5.5배. 실로 다양한 자연 경관의 백미를 보여주는 남쪽 해안지대는 가장 신비로운 자연 경관을 간직한 곳입니다. 웨스턴 케이프와 이스턴 케이프의 경계를 넘나드는 치치카마 국립공원(Tsitsikama Forest & Coastal National Park)은 웅장한 산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해안선과 함께 숨겨놓은 대자연의 경이로움이 가득합니다. 수려한 산세에 해변과 계곡 풍경에 더해 다양한 야생 동물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이곳은 남아공에서 가장 매력적인 국립공원입니다. 치치카마 국립공원은 거대한 가든 루트 국립공원의 일부로 해안선과 평행하게 달리는 치치카마 산맥을 따라 방대한 면적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오터 트레일이 포함된 플레튼버그 베이(Plettenburg Bay)에서 휴먼스도롭(Humansdorp)까지 82km에 달하는 해안을 담고 있는 이 곳에는 수달이 유명하며 바분, 원숭이, 영양 등의 포유류와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대양을 바라볼수 있도록 벽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된 어느 한갓진 해변 레스토랑에서 해산물로 점심을 먹고 잠시 산책을 합니다. 모래톱을 따라 걷는데 12월의 이곳 날씨는 꽤나 덥고 햇살이 따갑습니다. 그래도 바위들이 있는 쪽으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가 우리들 마음을 시원하게 씼어줍니다. 종주를 마치고 돌아와 하루 더 머물 숙소에 들어 방들을 배정받고 다시한번 중요한 임무를 집주인에게 상기시키며 당부합니다. 종주 시작점인 공원 주차장에 세워둘 차를 종주 마치는 날 가질러 가야하니 차편이 필요하다고.. 예상외로 주인은 백인이었으며 마침 놀러온 이웃 사람도 백인 여자. 폴란드 태생의 아버지 손을 잡고 이민왔다는데 이미 황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나름 트리 하우스처럼 독특하게 꾸며놓은 집과 내부 장식들이 마치 동화의 나라에 와 있는 듯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남아공이면 물론 소수의 백인들이 지배층을 이루지만 이런 외딴 곳에는 흑인들이 거주하며 생을 영위하겠거니하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져온 삶의 지혜와 형태가 문화란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을 비교우위에 둔 평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나라를 멸시의 시각으로 봐온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밥짓고 찌개끓이고 해서 저녁상을 마련하니 어느새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들고 마지막 태양빛은 종주를 마치고 내려올 언덕길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생각난 듯 한번씩 쳐대는 파도소리만 들려오고 사위는 고요한데 반쪽짜리 달은 이미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 뒤끝이 감미로운 남아공산 붉은 와인을 한모금 음미하며 마지막 발산하는 일몰의 태양빛에 물든 하늘과 바다를 가만 바라보며 마음은 이미 오터 해안길 한 선위에 서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