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안나푸르나. 그 길위에서.. 5
>

여행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이방인에게는 그저 속수무책입니다. 오월초의 시누와. 생각보다 추운 밤입니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시린 벽에 닿을 때 마다 잠이 깨어버리니 숙면을 취하지못하고 뒤척이게 합니다. 오늘은 2천 2백의 시누와에서 3천 1백 미터 고도의 데우랄리까지 지속되는 오름의 잔치날입니다.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역겹고 비린 네팔리 음식. 계란 후라이와 히말라야 빵 한조각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길을 나서는데 어두운 계곡 끝에 포진한 물고기 꼬리 마차푸차레가 하얀 빛을 발하며 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디를 다녀오는지 붉은 장삼의 수도승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갑니다. 이 길은 분명 불도에 정진하는 불가의 수도승들이 오가는 수행의 길이겠지만 나에게도 마찬가지 상념과 명상에 젖어보는 호젓한 순례의 길입니다. 내 남은 인생을 다듬고 마름질 하는 나만의 순례길입니다.    세상 오지 어디를 가나 고산에서의 주식은 감자입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경작할 수 있는 농작물이 이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만 다랭이 밭에 가득 심겨진 감자들을 보면 보는 이들도 가슴이 넉넉해집니다. 우리에게도 감자는 선조들의 고단한 삶과 함께 해온 애환이 묻어나는 식량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저마다 감자에 얽힌 유년의 추억은 다 지니고 있을것입니다. 길은 거의 식당을 겸한 로지를 지나게 되어있습니다. 길을 내어주는 댓가로 잠시 쉬어가며 음료수나 간식을 사먹게 하거나 혹은 하루 머물면서 숙식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하룻밤 숙박은 저녁과 아침 식사를 하면 거의 실비로 제공하는데 한끼 식사비 혹은 절반 가격 밖에 되지 않습니다. 초기 투자해놓고 온냉방의 기능이 전혀 없는지라 그런 계산이 나오는 듯 합니다. 최근들어 로지간 경쟁이 되니 제법 현대식으로 개축하기도 하나 ABC에 가까울수록 예전 그대로의 설비에 만족해야하는데 쪼그려앉아 볼일보는 푸세식에 합판으로 대충 지은 가건물에 바람은 여기저기서 쑹쑹 들어오고 옆방의 말소리까지 그대로 들려오는 등 사생활이 전혀 가려지지 않는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감수해야 할 순례의 길이기에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길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유실되어 버린 길 대신에 우회하는 길아닌 길은 아득하고 등골은 써늘합니다. 산사태로 다시 왔던 길 되돌아 임시로 난길로 가야합니다. 6월 부터 시작되는 아열대 우기에는 적잖은 도로의 침수와 붕괴가 이어지는데 오늘 이 무너져내린 길가에는 보수를 위해 마치 기계로 깍은듯이 매끈하고 가지런한 얇고도 넓은 바위판들을 옮겨 두었습니다. 조만간 이길도 다른 히말라야의 길처럼 단정한 돌계단으로 치장하게 되겠지요. 도반이라는 마을을 지납니다. 마을이래야 서너가구의 촌락인데 모두 로지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서너가구가 옹기종기 산자락에 모여 살다가 안나푸르나 가는 길이 개척되면서 방문객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시작하며 발전된 히말라야의 로지들. 매매할수도 없고 그저 가족에게만 상속된다 하는데 히말라야 트레킹의 붐을 타고 많은 축재를 한다 합니다. 하지만 그 돈을 쓸 시간의 여유가 없어 그저 포카라나 카트만두에다 땅사고 집사고 한다하니 왠지 그 인생이 참 팍팍한게 적어도 나에게는 부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토록 수려한 풍경속에서의 삶이 산을 좋아하는 이방인들에게나 평생의 숙원으로 여길수 있겠으나 현지 가이드나 셀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임에 분명한 것같습니다.   삶의 길로 다져진 히말라야의 길. 결코 나그네의 길이 아닙니다. 평생 이 장엄한 산에 기대어 산에서 나고 살다 묻히는 인생. 그 안에서 살아가는 셀파족들의 삶이란 몸을 숙여 순응하며 살아가는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며 산은 정복이 아니라 그저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가물가물 연결된 산비탈의 다락논. 우리에게 풍경이지만 저토록 가파른 경사에 매달려 사는 저들의 고충이 먼지처럼 호미질과 쟁기질에 일어납니다. 무심코 태양 볕에 달구어진 큰 바위위에 널거나 줄에 걸어놓은 빨래들. 비가와도 걷어내지 않습니다. 또 날이 개면 마르겠지 하고 두는 것 같이 서두르거나 보챌 일 없는 한없이 여유로운 삶들입니다. 푸른 물이 묻혀 나올듯한 하늘. 강과 산과 계곡 그리고 사람들. 집집마다 소원을 적어 비는 룽다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룽다는 티벳어로 바람의 말이란 뜻인데 경문이 가득 쓰여져 있고 여기에 적힌 진리가 바람을 타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서 모든 중생들이 해탈에 이르라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기에 그들은 천의 형체가 닳아 없어질 때 까지 그대로 걸어 놓아 둔다고 합니다. 널어둔 빨래까지도 룽다처럼 함께 바람에 펄럭입니다.    길은 또렷이 녹색 숲을 자르며 그어져 있고 오늘 우리가 묵을 데라울리 마을이 신기루 처럼 하늘거립니다. 3천 고도로 높아지니 이젠 빙하들이 나타나는데 눈녹은 물들이 계곡을 향해 내려가는 지류가 되어 요란스럽습니다. 곳곳에 이글루 같은 얼음 동굴이 많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만년설을 밝고 가는 생경한 느낌. 눈내리고 녹고 얼고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다져지는 빙하. 겨울을 지나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3,4월엔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계곡의 완만한 반대편으로 임시 길을 내어서 다니게 하는 구간입니다. 실족하면 직행 황천길인 아직 녹지 않은 수많은 눈길 벼랑을  걷는 동안 서로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마음의 생명줄로 묶어 건너갑니다. 하얀 만년설 입고 곱게 치장한 마차푸차레가 지는 해에 비낀 화사한 미소로 우리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길 곁에는 시냇물이 흐릅니다. 흐르는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깨끗할 지 가늠이 되는데 깊이 모인 용소의 바닥을 비추면 작은 돌 하나까지도 선명하게 보일만큼 맑습니다. 저 물에 발이라도 담그며 쉬어간다면 우리들의 영혼마저도 맑아질 듯 합니다. 유난히 돌이 많은 구간. 수행자들이 그랬는지 트레커들이 그랬는지 저마다의 소망과 염원을 담아 돌탑을 쌓아두었습니다. 비록 돌 하나 탑으로 올리지는 못했지만 조용히 합장하고 예를 올리며 지나갑니다. 이윽고 데라울리의 로지에 다다르고 여장을 풉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설산에 태양도 서둘러 내려앉고 이내 밤이 내리고 서늘한 밤기운도 차갑게 내립니다. 길손의 밤은 한잔술로 익어가고 시름을 달래보는 넋두리와 그간의 힘든 여정의 무용담 같은 대화로 깊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