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안나푸르나. 그 길위에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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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다고 칭얼댑니다. 생각보다 찬 기온에 정들지 않는 음식에 술로 떼운 그 간의 여정이 몸살기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길은 끝나지 않았고 꿈은 이어져 있으니 특별히 조제해온 약 한봉 얻어먹고 길을 나서야 합니다. 해뜨면 걷고 로지가 나오면 쉬고 해가 지면 잠자는 꾸밈없은 트레킹 여행의 일상으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이 시간. 그 사이로 단순하고도 평화스런 자족이 가득 채워집니다. 하지만 요즘은 명산 명트레일을 오르려면 땀과 시간과 돈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찾아 나서는 이유는 그 길 위에는 꿈이 있고 우정이 있고 사색이 따르며 순수함이 우러나고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죠지 말로리 그가 말했듯이 산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아침부터 자욱한 안개로 겨우 지척이 분간될 뿐 언제 비를 뿌릴지 모를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돕니다. 한고개 땀으로 넘어가니 급기야 비를 뿌립니다. 우의로 무장하고 돌밭길로 들어서는데 제법 광활한 개활지가 펼쳐지며 걸음을 여유롭게 합니다. 도인의 수염처럼 키보다 더 자란 풀이 고색창연한 바위 틈에 피어 길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산지대지만 생명수로 가득한 안나푸르나 가는 길에서만 볼수 있는 독특한 현상인데 사계절의 경계가 모호한 이곳 식생들은 생을 이어 죽고 사는 사이클이 아니라 그저 피고 지는 옷바꿈 만이 있을 뿐입니다. 흑과 백의 시공에 어스름한 산은 엷게 채색된 채 밑그림을 그리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이어가는 생명체들의 그 생의 윤회를 생각하니 더욱 몽환적인 풍경이 그려집니다. 몽유도원도.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기에 더욱 상상력이 동원되는 풍경 그 자체가 그림입니다. 빙하가 녹아 힘차게 내려가는 시내 곁에는 수많은 돌탑들이 염원으로 쌓여있는데 우리도 가슴에 소망 하나씩 품고서 안개를 헤치며 마지막 오르막길을 쳐 올립니다.   길은 험 할수록 그만큼 아름답고 몸이 고될수록 풍경은 더욱 수려해지고 또 걷는 만큼 얻을수 있는 빼어난 이승의 풍경들. 이땅의 풍성한 신의 가호를 받은 히말라야의 현대 문명이 근접하지 못할 소박한 길 위에서 내몫의 걸음을 맡아 두다리로 걷고 또 걸어 그것들을 얻으려합니다. 거침없는 경사길. 이제는 산도 사람도 지칩니다. 처음 출발했던 여러 나라에서 온 트레커들. 일정동안 거의 같은 지역에서 자고 출발하고 마감하니까 늘 길 위에서 만나게 되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진행하게 됩니다. 태국에서 온 대가족. 가장 연장자인 7순이 가까운 좌장이 몸이 불편한지 체력 때문인지 연세 탓인지 양 지팡이에 의지한 걸음걸이가 편치 않아 보입니다. 미리 출발하는 그를 늘 우리가 앞지르게 되는데 최종 하루치의 종착지에 도착할 때는 거의 비슷하게 들어서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변함없는 꾸준함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조율의 지혜가 가미되어야 하나 봅니다.     등에 지거나 이마에 이고 진 셀파 한무리들이 지나갑니다. 비를 맞은 탓인지 그들만의 특유한 냄새를 오늘 따라 더욱 유난스럽게 풍기며 지나는데 잉카트레킹의 포터들 냄새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힘겨운 여정에 세탁도 목욕도 제대로 못하니 당연하겠지만 매일같이 샤워를 해온 나에게도 그들과 비슷한 냄새가 남을 내가 감지 할수 있습니다. 그들의 음식을 먹는 동안 그들이 사용하는 향신료에 젖은 탓일까 아니면 히말라야 자연이 묻혀준 향취일까요? 그들의 가족을 위해 힘겨운 삶의 현장으로 내몰린 이 셀파들이 이 길 위에서 흘린 땀과 눈물의 의미를 우리는 익히 아는지라 이제는 나도 그들 삶의 향기를 사랑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정약용 선생은 걷는 것을 청복이라고 맑은 즐거움이라 했습니다. 그런 고통속에서도 순박한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씻는답니다. 바람 한점 햇살 한자락이 발을 멈추고 쉬어가는 곳.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마살라 차 한잔으로 몸도 마음도 녹여봅니다.    구름과 바람. 산과 하늘이 서로 맺고 풀면서 한폭 풍경화를 그려내는 히말라야. 바닥에는 영원히 녹지 않은 만년설이 켜켜이 쌓여있는데 또 그 밑에는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아찔하면서도 참 좋습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다가갈수록 설산들이 순백의 미소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산은 나무 한그루 없이 허허로운데 그 암묵적 계시로 산에서는 누구도 길을 재촉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붕. 그 아래 있음이 피부로 눈으로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왜 로지는 항상 언덕이나 벼랑 끝에 지어두었을까! 뻔히 보이면서도 마지막 다가가는 숨가픈 벼랑길도 이제 체념을 해버리니 고통의 쾌락마저 느낀다면 변태적 습성을 이 대자연 속에서 얻은 것일까! 배정받은 방에 배낭을 던지고 비까지 동반한 강한 바람을 헤치며 다시 올라갑니다. 무엇보다도 더 마주하고 싶었던 박영석 대장과 그와 함께 했던 꽃같은 청춘의 대원들. 여기가 안나푸르나 1봉 (8,091m) 바로 아래 그들이 우리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영원히 잠든 곳. 어느 로지에 가나 그들의 추모 사진과 함께 업적을 기리는 소개말이 부착이 되어 있을 정도로 모든 셀파들은 존경하며 추앙한답니다. 삶도 죽음도 한순간 바람이고 나그네길 같은 인생길. 짧지만 제대로 살다 긴 여운을 남기고 가버린 그들. 담배 한개피 불붙여 제단에 올리고 두손 합장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도 그들처럼 버리겠다는 욕심마저 버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