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빙하위를 비상하는 콘도르. 그 길위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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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적응을 위한 몸풀기격인 코치야 로스 아이레스(Cuchilla Los Aires) 트레킹에 나섭니다. 가이드 호세는 이미 네명의 트레커들을 태워오고 20분간의 차량이동으로 트레일 시작점에 도착하여 걷기 시작합니다. 3천에서 시작해 천사백을 올려야 하는 오늘 길. 그래도 초입에 들어서면 우선 너른 초원이 부드럽게 펼쳐지면서 그림엽서에서나 볼수 있는 너무 예쁜 물색을 지니고 있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모두 푸른 하늘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전 세계 9,000여종 중 1,800여 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새들의 천국인 이곳에 설산위로 날아다니는 콜롬비아의 나라새인 콘도르의 거대한 몸짓을 보면 경악 그 자체입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를 지나 완만한 산길을 올라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는 길에는 용맹정진하는 수도자의 모습같다고 Big Monks 라는 뜻으로 이름붙여진 프라일레혼(Frailejon) 지대를 지납니다. 일년에 1센티미터씩 자라는 선인장 닮은 해바라기속 식물인데 이 코쿠이의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일등공신입니다. 고도를 높일수록 이들의 키가 조금씩 작아지며 계곡을 따라 한적한 숲길이 이어집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풍경. 정적만이 감도는 길은 나와의 대화로 산책하기 참 좋은 길인데 깊이 들어마시는 바람엔 향긋한 꽃냄새와 초가을의 향기가 더불어 묻어옵니다. 어느새 해발 4000m가 넘어가고 몸은 땀이 배어 나오고 숨도 제법 가빠지는데 차오르는 설산 빙하 풍경이 궁금하여 조금만 급하게 걸으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가슴은 터질 듯이 답답해집니다. 높이 오를수록 기온은 떨어져도 햇살은 눈부시고 따가운데 적도 가까운 곳이기도 하지만 티없이 맑아 여과시킬게 없는 순수한 태양볕을 맞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하와이의 4천미터에서 고산을 다스리려고 30분간 누워 잠들었다가 그 다음날 얼굴의 피부 허물이 한겹 벗겨졌던 황당한 기억이 이순간 떠오릅니다. 4,350m 정점에 오르니 엘 코쿠이 국립공원의 장대한 빙하산군이 수려하게 펼쳐집니다. 방향을 돌리면서 확인하는 코쿠이의 상징적인 아이콘들. 저 멀리에 풀피토 델 디아블로와 판 데 아수카르의 장엄한 모습이 다가오고 내일 가볼까 망설이는 디비노 니뇨(Divino niño)의 하얀 빙하가 눈에 가득 찹니다.    결국 리타쿠바(Ritacuba) 트레일을 하기로 결정됩니다. 순전히 나의 의지라기 보다는 워낙 젊고 잘걷는 일행들의 선택에 따라갈수 밖에 없기도 했지만 조금은 더 힘들고 위험해도 그만큼 더 빼어난 풍경이 보답한다는 가이드 호세의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6시간 이상 걸리는 11km의 거리에 4,774m 정점을 찍기위해 1천 미터를 올라야하는 가파른 돌과 너덜길. 긴장과 흥분으로 조금은 상기된 표정을 관리하며 들머리로 이동합니다. 이른 아침 투명한 물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햇빛 머금은 자갈들이 내마음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얻게합니다. 계곡에 들어서니 어김없이 어제 보았던 프라일레혼이 이곳에도 지천인데 함초롬하게 이슬을 머금고 내키보다 두배는 더 커보이는 것들도 종종 보입니다. 이 정도 크기로 자랄라면 몇백년은 족히되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우기에 물을 품고 있다가 건기가 되면 풀어내는 이들이 있어 이 황량한 산하를 늘 적셔주니 이곳 식생들을 살아가게하나 봅니다. 어느 하나 자연의 조화가 극적으로 묘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우리 인간사도 서로 보완하고 잘 살아가면 좋겠다 생각이 듭니다. 길섶에는 빨간색이 강렬한 꽃도 자주 보이는데 꽃잎에 붙은 곤충을 먹고 사는 페가페가라는 식충식물이랍니다. 예쁠수록 가시가 있고 화려할수록 독이 많은 식물들의 세계인데 우리 인간세계는… 온갖 야생화들이 피어있는 고산 들판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 이어지고 모두들 저마다의 하늘이 담겨져 있습니다. 계곡 너머로 살며시 새하얀 봉우리를 내밀고 있는 설산들. 깔끔하게 그려낸 수채화 같습니다. 회색 돌들이 너절하게 흩어진 오르막길을 지나 두어 시간쯤 오르니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나오고 이어서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빙하군. 스노우 라인까지 다가 선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알라스카와 같은 북극권의 지저분한 빙하와 달리 파타고니아와 같은 남극권의 푸른 그것과 달리 이곳의 빙하는 얼음을 갈아놓은 순백의 눈꽃 빙수 같습니다. 그다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시리도록 선명한 새하얀 빙하는 검은 바위산의 황량함과 함께 오히려 대비의 조화를 이루며 이 순수의 땅을 채우고 있습니다. 환상의 천상세상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는데 하산길은 돌이 많은 너덜길이라 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 길을 꺼리는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이색의 풍경들을 대하니 마음만은 무척 가벼워집니다. 얼마나 다리에 힘을 주었는지 쥐가 나려 할 즈음에 잠시 호숫가에서 간식을 먹으며 쉬어갑니다. 하늘을 우르러 누웠는데 예쁜 구름들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내 시야에 다 채우지 못하는 이 푸른 하늘. 잠시 나는 이 깊은 바다에 빠져버리고 의식을 잃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