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종주 4.

페호 호수를 건너와 그란데 파이네 산장으로 모여드는 바람을 맞으며 게으른 아침을 맞이합니다. 간밤에 미친듯이 불어대던 바람도 숨을 죽이고 촉촉하게 젖은 채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새롭게 소생하는 모든 자연 속에서 시작하는 하루가 즐겁습니다. 바람이 모진 파타고니아의 날씨 예보는 아예 듣지도 보지도 않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모든 예측할 수 없는 것 까지 준비를 하고 트레킹에 나서라 조언합니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다 경험하는 이상한 나라. 바람의 나라. 그래도 치명적인 미를 간직한 채로 기다리는 그레이 빙하의 수려한 자태를 떠올리며 길을 나섭니다. 그래도 멀고 험한 W 트레킹이 다행스런 것은 가파르게 치고 올라야 하는 길은 배낭을 맡겨두고 몸만 홀가분하게 다녀올수 있다는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체력이 딸리는 이들은 어느 정도 까지 쉬엄쉬엄 올랐다가 적당한 곳에서 내려오면 되는 융통성이 부여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레이 빙하 호수는 파이네 그란데. 프랜치 벨리는 이탈리아노 캠핑장. 파이네는 칠레노 산장에 의탁하면 등반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호수 빛이 회색이라 이름 붙여진 그레이 빙원과 호수 빙하를 보러 가는데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서 시작됩니다. 호수 물은 석회질이 녹으며 생기는 현상으로 잿빛을 띠는데 너무나도 선명한 에메랄드빛의 빙하와 대비되어 더욱 신비미를 갖게 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자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목초지를 가로지르고 내를 건너며 계곡길을 따라 오릅니다. 야생화들이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장식을 하고 짦은 여름을 불사를 듯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피빛 꽃망울이 처절한 시루엘리요. 정복자들의 칼날 앞에 죽어간 이름 모를 원주민들의 낭자한 선혈이 맺힌 꽃 부루티지, 그래서 이것을 먹으면 다시 이땅에 돌아온다는 원주민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린 갈라파테 머루가 몸을 낮추어 조심스레 피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따 먹으며 비타민 C도 보충하고 이따금 이국땅에서 만나는 우리네 민들레가 참 정겹습니다. 여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어느새 성미 급한 가을은 나뭇잎새에 내려 주황의 가을 이미지를 영롱하게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뒤에 버티고 섰는 만년 설산과의 조화가 참으로 미려합니다.  시선을 두는 곳 어느곳이던 한푹의 풍경화가 아닐수 없습니다. 초점을 맞출 필요도 없이 구도를 잡을 필요도 없이 그저 고정시켜 셔터만 누르면 한폭의 풍경화가 되고 장인의 손에 그려진 명화가 되고 걸작품이 됩니다. 낯선 이방에서 낯선 풍경을 가슴으로 읽으며 바람이 인도하는 길을 즐겁게 걸어갑니다.   길은 외길. 별 특별한 이정표 없이도 수많은 트레커 들이 밟고 가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들판을 걸어갑니다. 특별히 가파른 길이 없는 이 코스는 한 시간 정도 가면 그레이 호수가 시작되고 또 한시간 더 가면 그 북서쪽 끝자락에 장구한 세월이 빚은 파이네의 빙하가 나타납니다. 거기서 두 시간을 더 가면 푸르스름한 빙원을 지척에 두고 감상하게 되는데 호수 주변에는 여름의 끝자락에 마지막 색을 발하는 파타고니아 부쉬 꽃이 동백꽃 보다 더 붉게 주변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한번 씩 몰아치는 강풍에 도래짓 하는 모습이 이 험난한 파타고니아의 자연환경에 아주 익숙한 것 같습니다만 우리 이방인들은 한번 씩 소스라치게 놀라며 애써 적응하려 노력합니다. 연평균 기온이 섭씨 9도. 아직까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농작물의 재배가 불가능한데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꽃들은 해거름이 없이 피고 또 핍니다. 또 바람에 대적하다 차마 못 이긴 나무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어 묘하고도 낯선 풍경을 선사합니다. 장대하게 펼쳐진 세계 3대 빙하 중의 하나인 이 파타고니아의 그레이 빙원을 마주하면서 이제 종주를 마감하는 실감이 들며 잘 해냈다며 신이 주는 포상 같습니다. 바람을 맞으며 오래동안 그 풍경을 감상하며 서로 열심히 사진들을 찍어주고 합니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산장으로 돌아오는 길. 발길이 참으로 가볍습니다. 경쾌하기도 하고요. 그리도 그렸던 정인과의 상봉이기에 이 길에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고 숱하게 갈등했던 지난 모든 것이 이 평화로운 정경 속에 고요히 남으며 또한 삶에 대한 온갖 바람도 미련도 회한도 모두 파이네의 바람으로 흩어집니다. 태평양에서 시작하여 파타고니아 서부를 지나온 냉혹한 바람에게 길을 내놓느라 마음껏 키를 키우지 못한 나지막한 관목들이 떠나는 우리를 애절하게 환송합니다. 자연 속 시간의 숨결이 흐르고 호반 물결의 노래가 온 누리에 퍼지는 파타고니아의 정경. 가슴이 멍해지는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슴에 채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이 파타고니아 미지의 나라를 걸으며 그 바람에 실려 날다보면 세상 근심 모두 잊고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 있겠지하는 정직한 소망을 말입니다.  저 멀리 아득히 넘고 건너고 걸어서 지나온 길을 내려다봅니다. 한번씩 살아온 인생길 되돌아 보듯이 힘겹게 올라온 길 되짚어 보며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절망하였던가를 반추해봅니다. 긴긴날 그리도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파타고니아, 끝도 없이 광대하게 펼쳐진 그레이 빙하를 지척에 두고 만감이 교차합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망설임이 떠나지 않던 나약한 자신을 뛰어넘어 지구의 반을 돌고 계절의 반대편에서 미지의 땅을 밟고 미답의 길을 오른 우리들. 우리는 이 길 위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가슴에 채워 갈수 있을까? 또  무엇을 버리고 얻을수 있으며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체념할 수 있을까? 끝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그 답은 당연 이 길위에 있었습니다. 이 파타고니아의 험한 길을 걸으며 나만의 정답과 나만의 인생 해법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 답도 다양할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소중한 이 하나 뿐인 내 삶을 누구에게서나 존경받아야 할 내 생을 더이상 허접하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자기 성찰같은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의 끝에서 나의 새로운 도전은 또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길 위에서 뜨거운 열정을 불살랐고 영원히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새겼습니다. 이곳 파타고니아에선 오직 자연만이 주인이며 사람은 단지 바람처럼 흘러가는 객일뿐이니 그저 우리는 향기처럼 왔다 오늘 저 안개처럼 흩어져 주는 것이 자연을 위해 우리가 보답하는길. 울지 않고는 떠날수 없다는 이길을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소매자락으로 훔치고 우리는 하늘에게 대신 울어달라 청을 넣고 바람따라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