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장 아름다운 계곡. 랑탕 밸리. 그 길위에서.. 2
>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이제 냄새조차도 맡기 역겨운 로지의 네팔리 음식과 주방냄새. 차라리 빈속으로 새벽 산행을 시작해 두세시간 혼줄놓고 걸은 뒤 라면 하나 끓여먹고 또 하염없이 걸어 로지에 일찌감치 도착하면 맥주나 독주로 취하면서 삶은 감자나 계란으로 식사를 대신합니다. 그러다 쓰러져 허물어져 버리면 또 아침이 찾아오고.. 해서 영택이라고 한국이름 지어준 가이드에게 다음 로지를 예약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의 한계까지 걷다가 지치면 들어가 자면 되는 곳을 다음 숙소로 하기로. 그래서 원래 오늘 마감하게 되어있는 랑탕마을은 그냥 지나쳐서 이틀치 일정의 목표점인 캉진곰파까지 오르기로 합니다. 최소 9, 10시간의 강행군. 결국 우리는 12일간의 원 일정을 8일로 줄여버릴 수 있게됩니다. 우리보다 게으르게 일어난 해가 산이며 골이며 구석구석 비출 때 Jugal 산이 그제서야 기지개를 켜고 넓은 분지에 가득 만개한 네팔의 국화 랄리구라스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16가지 색의 꽃잎을 가졌다는 이 네팔리 국화 중 우리가 걷고 있는 랑탕 계곡에는 흰. 분홍. 노랑 자주의 네가지 꽃색을 지니고만 있다합니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유순하게 만들어주는데 오늘은 그 무수한 낙화 위에 마른 낙엽까지 함께 뒹구니 낙엽길인지 꽃길인지 계절의 혼돈까지 옵니다.     이 계곡에서 가장 번성했던 랑탕 빌리지(3,500m)를 지납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흔적도 없이 땅속에 묻혀져버린 랑탕 마을. 공교롭게도 오늘인 4/25일이 꼭 네팔 지진이 발생한지 4년이 되는 날이며 이제 5년차로 들어갑니다. 네팔을 통털어 총 1만명의 희생자를 냈고 이 랑탕 계곡에서만도 1600명이 잠들어 있는 사자들. 지축의 흔들림에 바위구르고 돌 굴러 희생당한 경우는 극소수이고 대형사고는 산정에 매달려 있던 빙하가 흔들려 밀려내려오면서 이차로 덮친 산사태 때문이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피할수 없었던 지형 때문에 그리도 무수하게 많이들 죽었습니다. 랑탕의 그 큰 마을에서 단 하나 빙하가 무너져 내린 쪽의 바위절벽에 등을 대고 지은 3층 건물은 거짓말처럼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있습니다. 생과 사의 간극은 이처럼 몇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산사태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산 비탈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먼저간 그들을 애도하며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은 벌써 빛바래어 가는데 다행히 우리 한국인은 없네요. 매몰된 사람들을 수색하며 겨우 회수한 시신이 50구. 내 발아래 잠들어 있을 그 숱한 사람들이 아프다 소리치는 듯하여 걷는 내내 우리들 발걸음도 마음도 무겁고 숙연해져 어서 지나가려고 종종걸음으로 탈출하듯 벗어납니다. 깊은 애도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찌그러진 다리. 굴러 내려와 집에 박힌 바위. 무너진 집. 금간 벽. 지진 피해의 흔적은 여전히 아픔으로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로지를 운영하는 노부부는 세남매들과 오손도손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그때 지진으로 아들 하나를 잃고 나머지 살아남은 두 남매는 진저리를 치며 카트만두로 나가서 살면서 다시는 이 랑탕 계곡으로 들어오지 않겠다며 4년째 발걸음을 하지않고 있다고 넋두리하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랑탕의 나른한 오후 풍경. 이렇게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한데 그때 그 처참했던 참변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랑탕의 히말라야 설산들이 그저 가슴에 아픔을 묻고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습니다. 랑탕 빌리지를 조금 오르면 250m이상의 길이로 간단없이 길게 마니석이 이어져 있는데 세계 최장이랍니다. 이렇게 상징적인 종교적 명소가 있는데 신은 왜 지진이라는 참혹한 재난을 내려줘 비극을 겪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제 설산들과 빙하들로 병풍쳐진 가운데 손에 잡힐듯 캉진곰파 마을이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한시간은 더 올라가야 한답니다. 이제 랑탕의 최고봉 랑탕리룽(7,227m)이 좌측으로 솟아 오르고 여기서 북동쪽으로 약 6km 지점에는 중국영토로 복속된 시샤팡마(8,013m)도 버티고 있습니다. 랑탕 계곡을 걸으면서 제법 높은 지점에 오르면 어김없이 이 위풍당당한 시샤팡마의 남벽이 구름을 뿜어대며 눈에 잡힐 듯 합니다. 히말라야의 길은 모두 여행자를 위해 낸 길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모진 생을 이어가기 위한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 멀고 험한 길을 슬리퍼 하나 신고 야크를 몰며가고 등짐을 지고 재빠르게 내달리곤 합니다. 국립공원이라 함부로 벌목을 못하니 허가된 지역에서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한 땔감을 이고 올라오는 아낙네들의 이마에는 삶의 애환이 송알송알 맺혀져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길은 또 왜 그렇게 굴곡이 심한지 고도 천미터를 올린다 하면 그 두배 이상으로 잡아야 합니다. 오름길은 그냥 지속적으로 오르게 하지 왜 뚝떨어져서 내리고 다시 오르게 하며 또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부터 뭣 하나 변변한 장비나 도구없이 길을 내야했으므로 절벽과 암반 등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한번 오르거나 내리게 변환하게 해줌으로서 걷는 이들에게도 근육을 골고루 쓰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장기 도보 여행에는 더 좋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못마땅하여 홀로 불평을 투절대며 오기로 걷다보니 햇살에 반짝이는 금색 지붕이 특이한 힌두 사원이 서있는 동네 어귀를 지납니다. 길이 꺾이는 전망좋은 곳에서 산들을 둘러봅니다. 지친듯 서산을 넘어가는 해가 비쳐주는 랑탕 히말의 산들. 황금빛 산정들은 그저 묵묵히 말이 없습니다. 제법 지친 내몸도 아프다 합니다. 오줌색이 샛노랗게 변해서 나오고 허리띠도 이미 두칸을 줄일 정도로 몸무게가 줄었습니다. 지고가는 태양볕이 무겁기만 합니다. 고산증세로 힘들어하는 동행들과 마지막 힘을 다해 마을을 통과해 가이드가 인도하는 로지로 기어들어갑니다. 70년전 틸만이 찾았던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목동이 거쳐하는 움막 하나 달랑 있었다 했는데 지금은 수십채의 제법 큰 마을이 조성되어있고 새로 짓는 건물들도 한창 진행중입니다. 그중 4층짜리 고층 빌딩이 숙소인데 젊은 주인놈이 제법 영어도 구사하며 유머도 많으며 얼굴이 두껍습니다. 우선 술로 매상을 올려주니 기분이 좋았는지 주방을 내주길래 우리 안주 만들어 내와서 오랜만에 입을 즐겁게 합니다. 고도를 높일수록 덩달아 마구 올라가는 술값을 식대 대신으로 감당하며 한잔 두잔 마시다보면 술에 취해 기분좋게 저 달과 함께 쓰러집니다. 달빛에 비치는 설봉들이 더욱 하얗게 빛을 발하니 마을은 참 거대한 가로등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