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안나푸르나. 그 길위에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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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는 평화로움이 축복처럼 은총처럼 내리는 다이 계곡의 아침. 푸른 하늘위로 유유히 흐르는 구름과 인도양을 건너온 아열대성 바람에 빛을 내며 흔들리는 수풀. 그 속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뭐라고 지지배배 재잘대는 산새들. 깊은 협곡을 건너면 아찔하게 출렁이는 구름다리. 미풍에 나부끼는 오색깃발. 히말라야의 대자연 앞에서 사뭇 경건해집니다. 밤부에서 오늘의 종착지인 지누난다까지 내려가는 길에는 네팔리들의 친환경적 전통 가옥들이 많아 히말라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의 숨터인데 자연에서 줏어다 지은 집들입니다. 대충 얼기설기 엮고 돌을 쌓고 흙을 바르고 마지막 돌지붕으로 덮으면 됩니다. 풍취에 취해 한잔 하고 싶다면 이층으로 올리고 베란다를 내어 나무 탁자에 걸상 두엇 마련하고 사랑하는 이와 마주하면 됩니다. 투박한 자연속의 소박한 삶. 그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배웁니다. 삶의 근원적 유토피아는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의외로 부탄이나 방글라데시와 더불어 네팔도 행복지수가 월등하게 높이나온다 합니다.    이제 시누와를 지나고 촘롱을 거쳐 지누난다로 내려가는데 시누와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오늘 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그려져 보입니다. 시누와와 지누난다를 바로 이으면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을 절약할 수 있을텐데 기득권을 움켜쥔 촘롱 사람들의 정치적 공작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답니다. 돈들을 제법 바른 건물들을 보유하고 롯지들이 많고 번화한 촘롱을 반드시 경유하게 한 ABC 가는 길. 어디가나 썩은 정치꾼에 권력에 줄을 대고 이익을 취하는 행태는 있어 애꿎은 순례자들의 발품은 더 힘들게합니다. 이젠 길 위에 가축들의 분비물들이 푸짐하게 퍼져있습니다. 힌두교를 믿는 네팔에서도 식용으로도 가능한 검은 무소(Buffalo)들이 길에도 마을 어귀에도 퍼져 있습니다. 10마리 정도 말을 몰고 물품을 이동하는 마부들. 열살을 겨우 넘긴 미소년 목동 둘이 지휘하는데 체중을 줄여 말의 고통을 덜게 하려는 배려인 것 같습니다. 학교도 못가고 직업전선에 몰린 왕짜증을 말에게 풀려는듯 묘한 괴성을 지르며 모질게 채찍질을 해댑니다. 로지의 위치에 따라 이렇게 상대적으로 낮은 곳은 물품 운반을 가축들에게 맡기지만 높은 곳은 셀파족들이 이고 지고 나르기에 물가가 점점 올라가는 것을 확연히 알수 있습니다. 맥주 한병이 2천원에서 7천원 까지 점진적으로 오름을 무슨 수학의 도표로 보는 듯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 표고 3,000m 이상에서만 서식하는 야크들. 주로 짐을 옮기는 운반수단으로 사용되는 세르파 산악민족에게는 제일의 재산이자 가족인데 오늘은 따스한 햇살 아래 한없이 게으른 울음을 웁니다. 나도 함께 저 돌담 위에 누워 하늘만 멍하니 쳐다만 봐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도인이 될것 같습니다. 몇송이 남지 않은 랄리구라스의 붉은 꽃이 아침 싱그러운 햇살아래 영롱하게 빤짝이고 있습니다.    산허리를 꺾어 돌아가는 전망좋은 마루에는 어김없이 쉬바신을 모신 작은 사당이 축성되어있고 향불을 피워 인간 세상으로 번져가도록 해두었습니다. 정말 신이없는 삶은 이들에겐 무의미하다 할만큼 깊이 베어있고 그렇게 살아오는 이들은 참 순수하고 착하다는걸 느낄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이 동네에도 중생구제의 염원을 품은 스투파에 걸린 타루초가 힘차게 바람에 펄럭입니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걸으면 험하고 힘든 길 견뎌내며 걸을만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는 대자연이지만 다만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마음의 안식과 풍요로움은 다를 것입니다. 이 발 고난의 길에 힘들어해도 다음 산모퉁이 돌면 펼쳐질 또 한편의 대경관에 가슴설레는 기다림의 행복감으로 신나게 걷습니다. 대자연을 등에 업고 가슴에 품고있어 더 행복합니다. 길 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사연을 듣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며 교훈인데 오늘은 한국인 부녀 여행자를 만납니다. 고 2의 세째인 막내딸을 1년 휴학하게 하고 전세계를 돌면서 세상보는 안목을 넓혀주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고 배우게 하려는 시도를 모든 자식들에게 해왔다는 50대의 아버지. 그 뜻에 반하지 않고 얼마나 힘든 여정일 줄 알면서도 흔쾌히 따라 나선 예쁜 딸. 참 훌륭한 부성과 효성을 지녔다 여겨지는데 격의없이 친한 친구처럼 이어가는 그들만의 세상 나들이. 그 아름다운 동행이 노을지는 산자락을 넘을 때 눈물겹도록 눈부십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끝없는 웃음의 대화로 이어가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해주지 못한 채 훌쩍 커버려 시집갈 나이가 되어버린 내 두딸이 떠올라 회한의 상처로 가슴 아파옵니다. 삶이라 치부하고 생활이라 핑계대고 빈부라 둘러대며 함께 나누지 못한 청소년기의 그 소중했던 시간. 이제와 후회하는 미련함을 스스로 나무라며 지금이라도 부녀간의 따스한 정을 서로 나눌 길을 모색하려 노력합니다. 로지에 도착하면 오늘은 두 딸들에게 긴 안부 편지라도 써야겠습니다.    하산할수록 기온은 높아져 무덥기까지 합니다. 후덥지근한 기후에 비가 쏟아지려는지 산허리로 구름이 올라가고 점점 어두워집니다. 히말라야의 날씨는 무슨 불변의 공식처럼 시간대에 따라 변합니다. 하루 중 가장 추운 이른 새벽에는 깨질듯 맑고 청명하다가 오전 점점 기온이 높아지면 개스와 안개가 끼다가 오후면 모인 안개가 구름을 만들고 급기야는 비가 되어 내립니다. 그러다 다시 밤이 오면 추워지면서 구름이 걷히며 깨끗해지고. 그래서 머리에 흰구름 모자를 항상 쓰고 있는 히말라야의 고봉들입니다.    촘롱을 지나 지누난다로 내려가는 마지막 하산길. 지독한 급경사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18고개로 더 잘 알려진 구간입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고개길. 한국 산에서 흔히 얘기하는 깔딱고개가 수시간을 쉼없이 이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가 나와버려서 그렇게 부른답니다. 외국 트레커들도 이 지난한 오름의 고갯길을 오르며 킬링 스텝(killing steps)이라고 이름지웠다 합니다만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표현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문명세계와 가까워진 지누난다의 로지들도 한층 현대식이며 이제사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와이파이도 터집니다. 모두 가벼운 옷차림으로 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천연 온천으로 알려진 곳이니까요. 30분 내려가서 4,50분 올라와야 하는데 그래서 다 씻고도 다시 땀흘리고 올라와야 하는 남는 것 없는 장사입니다. 그래도 히말라야에서 묻힌 때 히말라야에서 벗기고 와야하지 않겠냐고 망설이는 일행들을 다그칩니다. 하루 아니 오랜 날 동안 쌓인 피로가 별 뜨겁지도 않고 유황 냄새도 나지 않는 온천욕 한번으로 풀어질까만은 참았던 맥주의 청량함을 더 높이기 위해서라도 필요합니다. 해가 늬엇늬엇 저물어가는 해거름에 전망좋은 로지의 탁자에 앉아 한잔 두잔 더해가는 히말라야의 맥주 맛에 취하니 모든 것이 꿈처럼 허물어져 갑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포만감이 충만한 저녁입니다. 비를 데려오는 두꺼비 한마리 좁은 마당을 휘젓고 다니고 잠자리 만한 벌레들이 빛을 쫓아 비행을 하니 몽롱하게 취한 눈에는 여정을 마감한 우리들을 축하하는 오색종이의 뿌려짐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