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안나푸르나. 그 길위에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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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무섭게 비를 뿌리더니 아침이 되니 제법 잦아 들었으나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 서둘러 길을 나서야 할 까닭도 없는 것이 서너시간 걸으면 시나이에 도착하고 대기한 차량으로 포카라로 이동하면 여정은 끝이 납니다. 처음으로 아침 여유를 즐기면서 오랜만에 장을 다 비운 느낌의 쾌변도 보고 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오래지않아 비는 그치고 길을 나섭니다. 강물 하나 건너고 작은 고개 하나 넘으니 하늘엔 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뙤약볕이 점점 더 달구어집니다. 이제는 몸은 온통 땀으로 젖고 조금만 걷다보면 로지마다 유혹하는 냉수에 담아둔 음료수와 맥주가 땡기는 한낮입니다.    물이 세차게 흐르는 지점에 물을 모이게 하고 굵은 수도관으로 연결해 산아래로 보내는 시설이 있는데 물이 부족한 어느 마을의 식수용인가 했더니 발전용이라합니다. 국립공원 측에서 투자하여 관리하는데 수백미터를 내려가 그 낙차로 수력발전을 이루어내지만 저 빈약한 시설로 전기를 공급하니 당연 풍족하지 못하겠지요. 로지에 들면 낮시간은 완전히 정전이었다가 밤이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오니 이 시간대를 맞추어 전자기기들의 충전을 마감해야합니다. 물론 그것도 그냥 쓰는 것이 아니고 지정된 요금을 내고 말입니다.    마을을 지나며 흐르는 작은 시냇물. 우리들 어린 시절이 이곳에 있습니다. 정겹게도 나즈막한 돌담아래로 티없이 맑고 정갈한 물이 이끼와 잡풀로 우거진 돌틈 사이로 흐르며 우리네 삶을 적셔주던 냇물입니다. 유난히도 많았던 미꾸라지며 붕어를 잡기 위해 수초들을 헤집고 통발을 설치하고 짧은 여름밤을 길게도 기다리던 기억들. 물이 여기저기서 제법 많이 모여드는 동네 어귀에서는 엄마들이 모여 동네 소문을 양산해내던 말공장 빨래터도 있었고요. 어느 고향 마을을 가더라도 매양 한가지인 마을 앞 개울과 마을 뒤 저수지가 있는 풍경. 유난히도 작가 황순원의 소나기라는 작품의 배경같던 내 향리의 풍경이 있는 유년이 들춰지며 잊지못할 웃음서린 소중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결국 겨우 목적지를 십여분 남겨두고 한 로지에서 맥주를 시킵니다. 언덕배기에 나무 축대 쌓아 지어진 티키 쉼터. 계곡의 바람이 이곳으로 다 불어오는 양 시원한 곳이라 차마 떨치고 갈수 없어서 자리잡고 앉아서 땀을 식히며 한담을 풀어냅니다. 축대 아래는 대파며 마늘이 영글고 있어 한뿌리 씩 캐와서 안주로 대신합니다. 많은 비가 내란터라 울창한 숲에 가려진 계곡에는 물 흘러가는 소리가 굉장하여 우리들 대화의 톤을 높여야 할 지경입니다. 그 시선을 위로 들어보니 비온 후의 산정 풍광이 더욱 깨끗한데 눈으로 내린 고봉들은 더욱 미려한 자태를 선명하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저곳을 다녀왔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 순간순간에 얽힌 우리의 기억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함께 넘었던 수많은 고개들과 함께 말입니다.    포카라로 달려갑니다. 한적한 산촌 풍경이 펼쳐지는데 많은 생각에 잠은 오지 않습니다. 비포장 도로 덕에 너무 덜컹거리는 이유도 있었지만 지난 9일간의 여정이 꼬리를 물고 연상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길에는 경이로 다가오던 하얀 순백의 만년설, 그 설산을 빨갛게 물들이고 황홀하게 저물던 저녁노을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서려있는 돌담길과 다랭이 논들, 산들산들 불어오는 따사로운 바람, 코를 자극하는 꽃향기들이 있어 오랜 시간 걸음의 고행을 지속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후에 얻는 성취감과 배우는 삶의 방향. 인생을 살아가며 소중한 것 일수록 그저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굳이 오늘 묵을 한인 식당 겸 숙소로 참고 달려온 이유는 그립고 그리웠던 찰진 쌀밥에 삼겹살 구이 그리고 신선한 한식 반찬으로 제대로 즐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배추 된장국에 생 삼겹살에 이밥과 찬들. 차게 해둔 소주와 함께 먹으니 오감이 행복합니다. 홀로 여행이나 배낭 여행으로 포카라를 찾는 이들에게는 성지처럼 명소가 되어버린 이 곳은 나름 예쁜 정원을 지니고 있고 깔끔하게 숙소도 마련하여 무척 이상적인 가격으로 숙박하게 하면서 많은 여행과 지역 정보를 제공합니다. 무자비한 휴식이 필요하다며 나들이를 꺼리는 일행들에게 잠시 달콤한 오수를 즐기게 휴식의 시간을 주고 더위가 한풀 꺾인 해거름에 낮술이라는 상호를 지닌 식당으로 향합니다. 이곳의 상호들이 모두 특색이 있고 흥미롭습니다. 모두 역마살 낀 인생이라 세상 오지를 떠돌다 이곳에 반해서 정착한 사람들이기에 그렇겠죠. 걸어도 15분 택시 타도 2불. 작은 도시입니다. 차로 가서 부른 배 소화시키며 걸어서 돌아옵니다. 깔끔한 밑반찬에 막지은 쫀득쫀득한 쌀밥.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켜봅다. 그리웠던 우리네 음식이기에 욕심도 부리지만 전혀 부담없는 가격에 과욕이 더합니다. 인심 넉넉한 쥔 아저씨의 부추전과 야크 치즈 구이 서비스에 한순배 술이 더 돌아갑니다. 세상 근심도 해야할 일도 없이 한없이 자유롭고 홀가분한 이 시간. 달도 별도 취하고 밤까지도 함께 취하는데 설산은 환한 미소로 우리의 귀환길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대 자연을,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를 가슴에 품고 돌아가는 이 여정.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이곳을 찾을 여러분들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