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처녀. 융프라우. 그 길위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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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걸리는 융프라우 라운드 종주는 아이거(3,970m)와 묀히(4,099m), 융프라우(4,158m)로 이어지는 베르너 오버란트산군을 비롯하여 베터호른(3,701m)과 브라이트호른(3,782m) 그리고 쉴트호른(2,970m)같은 스위스의 영봉을 바라보며 걷는 약 110km 알프스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입니다. 인터라켄 다음역인 빌더스빌에서 산악궤도열차를 타고 올라가 쉬니케 플라테(Schynige Platte : 1,967m)에서 시작합니다. 다른 유럽의 산악지대처럼 잘 갖추어진 산장과 호텔등에서 자거나 자유롭게 텐트를 칠수 있는 백팩킹도 가능한데 큰마을이 중간중간에 있어 물품을 구할수 있습니다. 산장에서는 현금 결재만 가능하니 미리 준비해 가야하며 종반 루트에서 사정과 환경에 따라 라우터브룬넨이나 뮤렌 등으로 빠져나와서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삼각산 뿔위에 위치한 파울호른의 산장. 일망무제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융프라우와 아이거봉을 차오른 태양의 멋진 일출을 감상하며 힘찬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거의 하산형태의 길을 걸으며 여유있게 알프스의 들꽃들을 제대로 감상할 것인데 이 구간은 아마도 여행자든 등산가든 누구나 가장 많이 방문하는 인기높은 길입니다. 그 중심에 바흐알프 호수(Bachalpsee : 2,265m)가 있어 그런데 티없이 맑은 수면에 비치는 건너편 만년설의 웅장한 자태가 모두를 압도합니다.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와 피르스트에서 시작하는 길이 비교적 짧고 평탄해 남녀노소 누구나 별 무리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산장과 작별하고 가슨보든  안부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바흐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부터는 가파르게 이어집니다. 중간에 돌로 지은 대피소가 있는데 비오고 찬바람 불어대던 어느날 이 헛간같은 대피소에서 어묵국 끓여 도시락 먹든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게 됩니다. 호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호수를 채우는 알프스의 풍경. 맑은 하늘에 흩어진 새털 구름처럼 호수 주변으로 목화닮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무리를 지어 앞을 다투어 피고지니 산하는 온통 화려한 꽃밭을 이룹니다. 바흐 호수에 비친 영봉들의 풍광은 알프스를 대표하는 홍보 책자에 단골로 나오는 것으로 많은 방문객이 이어지는데 그 중에는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산행을 나선 어린 하이커들도 허다합니다. 스위스의 아이들은 그렇게 어릴 적부터 산과 자연을 접하며 인성을 키워나가며 산악인이나 가이드로의 미래를 다져갑니다. 베터호른을 마주하고 피르스트(First : 2,167m)로 다가가는데 방문객들이 곤돌라를 타고 간단없이 올라들 오고 있습니다. 나의 수많은 이 지역의 방문에 속깊은 정이 들었을까? 산양 세마리가 우리와 동행하여 가다 서고 쉬고를 함께 합니다. 사진을 찍느라 멈춰서면 그들은 풀을 뜯고 출발하면 다시 졸졸졸 따르는 이 무리들. 신기하다고 던지는 행인들의 부러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피르스트 절벽 트레일을 걸으며 다리도 풀고 장대하게 앞을 가린 설산군의 위용을 감상한 후 그린델발트로 향한 하산길을 내려갑니다. 산허리를 끼며 걸어 그로세 샤이데크(Grosse Scheidegg : 1,962m)로 향하면서 펼쳐지는 마을과 영봉들의 전체적인 풍경은 상당히 익숙한데 늘 봐오던 알프스의 전형적인 그림입니다. 조금은 이르게 들어서는 그린델발트 도시는 거의 축제 분위기입니다. 어제는 울트라 이이거 산악 마라톤 제전이 있었고 오늘은 그 축전의 일환인지 특별장이 섰습니다. 메인 도로는 차량을 통제하고 양편으로 수백개의 텐트와 부스가 차려져 있고 백화점 수준의 먹거리와 살거리들이 쌓여있습니다. 수제맥주. 갓 구운 바게뜨. 소세지와 치즈 등 한아름 장을 보고 마을 명소들을 둘러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냅니다. 일찌감치 아이거가 바로 보이는 숙소에 들어 발코니에 모두 둘러앉아 전리품을 끄내놓고 한잔씩 권하면서 호탕한 산촌의 밤을 맞이합니다.  알프스의 끝없는 도전으로 일구어진 산악마을 그린델발트. 험상궂은 알프스 산군아래 둥지를 튼 이곳은 여러 트레킹을 위해 흩어지는 갈림길인데 주변을 올려다보면 설산들이 눈에 한가득 들어옵니다. 마을길은 그대로 트레일이 되어 연결되는데 계절도 경계가 없이 이어집니다. 이 낯선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흠뻑 흡입하리라는 기대에 마음도 설레입니다. 오늘은 융프라우요흐로 가기 위한 마지막 정차점인 아이거 글래쳐까지 진군하여 거대 빙하와 눈맞춤하고 내려와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 Scheidegg : 2,061m)로 올라가서 360도 조망이 가능한 멘리한을 최종 목표로 잡습니다. 마을 빠져나와 산악열차의 협궤를 교차하며 알피글렌(Alpiglen·1,620m)으로 꾸준하게 오르는데 한 고개 넘어가면 또 한고개 나타나고 릿지길이 무던히도 길게 이어집니다. 그 길은 천상의 길이며 초록물이 들어 마냥 싱그러운 꽃길입니다. 좌우로 가득 채워진 융푸라우 산군의 장쾌함을 따라 우리들의 발길도 신이 나는 길입니다. 하늘대는 야생화들이 오늘따라 더욱 귀엽기만 하고 흘러가는 바람도 신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이거 트레일을 따라 이어진 길을 계속 오르는데 아이거의 품이 이렇게나 넓은가 느낄만큼 제법 길게 이어집니다. 걷는 내내 좌측으로 아이거 북벽이 우측으로는 멘리헨의 너른 초원이 펼쳐져 있어 한없이 가슴이 넓어집니다. 거대하고도 말문을 일시에 제압하는 빙하군의 바로 아래 칼날 능선 위에서 더욱 왜소해지는 인간의 모습, 내 자화상을 보며 더욱 겸허롭게 살아야 함을 자각하게 됩니다. 빙하와 야생화를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씩 남기고 클라이네 슈데크로 하산하는데 그 길에는 작은 호수가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2012년 융프라우요흐를 오가는 세기의 역사인 산악열차 개통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인공호수지만 옥색으로 곱게 조성하고 물속에 벤치를 담아두고 뽀글뽀글 방울이 솟아오르게 하여 고단한 길손들의 발을 식혀가게 만들어둔 작은 정성이 고맙기는 합니다. 곁에는 한국인 6명을 포함한 산악인 64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이거 북벽(North Face)을 망원경으로 볼수있도록 고정해 두었는데 그 중 몇개는 수습하지 않은 시신이 그대로 자일에 매달려있다고 하니 순간 경건해집니다. 그 후 편안한 길을 두어시간 걸어 망루처럼 봉긋 솟아오른 멘리첸 산장에 도착하니 트로이 목마로 만들어놓은 어린이들을 위한 미끄럼틀과 놀이터가 조성되어있고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에는 웅장한 알프스 산군이 거대하게 펼쳐집니다. 마냥 그 품에 안겨있고 싶었으나 구름이 두터워지더니 한방울 두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이 천하제일경을 마주하고 어이 허망하게 자리를 뜰수 있을까! 널게 펴놓은 야외 우산아래서 맥주 한조끼 커피 한종지 취향대로 시켜 마시며 구름 장막이 열었다 닫았다를 연신 반복하며 펼쳐놓는 베르너 오버란트 산군에 빨려 들어갑니다. 멀지않은 융프라우 쪽에서 거대한 세락이 무너지는 굉음과 추락하는 그 광경. 온몸에 전율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