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변방 에크랑 국립공원. 그 길 위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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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이즈는 종주를 절반 정도 한 지점입니다. 특히 기념할 일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며 Glacier Blanc를 만나보기로 했기에 오늘만큼은 찐하게 한잔할 양으로 마트에 들러 맥주. 와인과 함께 독주도 한병 더 챙깁니다. 계곡 양편으로 형성된 제법 큰 마을의 가장 상단부에 위치한 숙소는 주변 전망이 빼어납니다. 2미터는 넘어보이는 장신의 주인 청년 에밀이 맞이하는데 그 테라스 전망이 너무 황홀해 배낭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폭풍으로 주안상을 차려놓고 저무는 해를 바라봅니다. 잠시 후 일마치고 돌아온 여동생이 친구 하나를 데려와 동석을 하니 술판은 더 커집니다. 그들이 가져온 맥주와 우리 맥주. 와인도 동이 나고 이제 코코넛 럼주까지 비우며 수다도 더해갑니다. 파안대소하며 거나하게 익어가는 주흥. BTS와 블랙 핑크 이야기며 코로나 방역의 우수성등 한국에 대한 자랑섞인 대화로 저녁 시간은 기분좋게 익어갑니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발루이즈 설봉이 마지막 붉은 빛으로 사위어 갈때 아껴둔 떡국과 만두로 국을 끓여냅니다. 한국의 맛을 소개하니 두그릇씩 뚝딱합니다. 키가 크니 위도 길고 장도 길어 많이 들어가나 봅니다. 다음날 아침 그네들 아버지도 잠시 들렀는데 그도 역시 얼굴까지도 무척 길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신장에 맞췄는지 벽에다 붙여 설치한 내방의 화장실 변기는 너무 높이 붙어있어서 볼일 볼때마다 허공에 떠있는 기분입니다. 나도 작은 키가 아닌데 원활한 볼일을 보기 위해 옆에 있던 휴지통을 뉘어서 발을 올리고 해결해야했습니다. 어둠이 짙어지고 이제는 차분한 분위기로 젖어들면서 이 두남매의 우울한 가정사를 듣게 됩니다. 일찌감치 이혼을 한 엄마는 딴사람을 만나 딴도시로 가버리고 아버지도 이 산장을 두 남매한테 맡기고 일찾아 떠나버리니 그저 어린 둘이서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그의 좁은 어깨를 쓰다듬어 주면서 마지막 잔을 권합니다.    산촌의 아침이 깃들면서 설봉을 비추는 아침 햇살에 주변산들도 하나둘 잠에서 깨어납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어서 방하나씩을 각각 차지하고 편한밤을 보냈습니다. 전날 후의가 감사하다며 에밀은 대신 아침을 차려주었습니다. 기다렸다는듯이 우리를 보고서는 계란을 어떻게 요리해줄까냐고 묻는데 이것은 직접 키우는 산장 모퉁이 닭장에서 꺼내온 싱싱한 올개닉입니다. 신선한 맛에 기분도 상쾌해지니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떠납니다. 샛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단풍 사이로 오전 햇살이 비끼니 그 색은 번져서 온 산하를 물들입니다. 주말도 아닌데 문닫은 식당 앞으로 주차한 차들이 줄을 이었고 오가는 방문객도 넘쳐납니다. 시원한 폭포수가 낙하하는 소리를 따라 길을 잡아가며 전방을 올려다보니 이리저리 휘두르는 등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르고 있습니다. 좌측 협곡에는 그대로 남아있는 만년설이 녹으면서 폭포로 내리고 그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을 달리니 목조 다리를 건너서 등반이 시작됩니다. 조금씩 고도를 올리면 이제 하나둘 늘어나는 고산 설봉들. 그 너머로 손을 대면 쨍하고 깨질건만 같은 쪽빛 하늘과 아무렇게나 흩어놓은 솜같은 구름이 산봉들을 휘감고 있습니다. 에크랑은 칼날 같은 바위산이 많아 암벽 등반의 메카로 불리는데 봉우리들은 전부 깎아지른 듯 뾰족하고 날카로운 수직 봉우리들입니다. 빙하가 뭉뚱그린 후 비바람이 깎고 또 깎아 만든 신의 빼어난 조각품으로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기에는 차마 두렵습니다. 혹자는 이 에크랑 국립공원 산군을 에둘러 걷는 길 GR54가 몽블랑을 한바퀴 도는 TMB보다 더 장대하고 도전적이며 전망도 더 빼어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몽블랑은 프랑스 국립공원에서 빠져있다고 합니다만 다만 그런 이유에서만이 아닐테고 분명코 그곳도 대단하지요.    1차 정상에 올라서 산아래를 조망합니다. 넓은 계곡은 연두와 노랑을 뒤섞어 놓은 듯 물들어있고 좌로는 산봉들이 겹겹이 말을 달리듯 힘차게 이어지고 계곡넘어 지평선은 만년설봉들로 채워져 있으니 왜 이다지 많은 산객들을 불러들이는지 공감할수 있습니다. 이제 길은 두 암산 사이로 뱀처럼 돌아가고 암벽등반에 가까운 구간도 실행해야 합니다. 바위들은 마치 거대한 용들이 엉켜서 누워있는 듯하고 글래이셔 블랑크(하얀 빙하)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게ㅜ정상에는 모두들 빙하가 매달려 있습니다.   다시 한참을 오르면 마침내 전망대가 나옵니다. 더욱 가까워진 하얀 빙하군. 그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다가 모여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포를 만들었습니다. 그 한곳에 살며시 숨어있는 산장. 이곳이 사실은 모든 이들의 최종 목적지이지만 오프 시즌이라 영업을 종료한 까닭에 거의 가지않고 여기서 돌아들 갑니다. 발아래는 시냇물이 흐르니 다들 내려가 물가 주변 바위위에서 점심도 먹고 쉬어들 갑니다. 우리도 버너를 피워 라면을 끓여 다른 먹거리와 점심을 즐깁니다. 이런 풍경 앞에서 먹는 어떤 주전부리라도 맛이 없다 한다면 그는 분명 정상적이지 않다 하겠습니다. 가을 햇살이 감미로운 오후 시간. 꿈처럼 나른해집니다.